독립유공자 백학선 특공대장의 손자 백형래 씨
독립유공자 백학선 특공대장의 손자 백형래 씨
  • 이소희 기자
  • 승인 2015.02.27 21:47
  • 호수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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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 태어난 유복자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외침소리가 나라에 울렸다. 많은 애국 열사·의사들의 피땀 위에 이룩한 대한민국의 자유. 제96주년 3.1절을 맞아 광양의 애국지사를 찾아보았다.

광양시 독립운동가 중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유공자는 33명, 등록되지 못한 분들까지 더하면 65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생존하신 분은 없고, 유족들만이 남아 조상이 걸어온 애국의 길을 곱씹고 있었다. 항일의병 운동으로 건국훈장애국장을 받은 백학선 선생의 손자 백형래(62 세)씨를 만났다.

백학선 선생은 1887년 4월 24일 태어나 1909년 7월 19일, 2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진상 어치마을에 살던 백학선 선생이 돌아가시자, 백형래 씨 할머니는 자식을 데리고 친정 동네인 성황동 용장 마을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백학선 선생의 손자 백형래 씨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자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백형래 씨는 아픈 할머니를 병수발하며 할머니에게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할아버지 업적에 대해 백형래 씨는“할아버지는 망덕항에 있던 일본 헌병을 사살하기도 하고, 무기도 없이 관청을 급습해 일본 헌병들에게 고춧가루를 뿌린 일도 있었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백 씨는“제 생각에는 할아버지 성격이 무척 다혈질이었던 분이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언제나 화를 잘 참지 못하는 분이라고 하셨거든요”라며 웃었다.

백형래 씨가 그의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신기했던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할어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의병이 해산되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묘도로 피신하던 중 선상에서 일본 헌병의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다.

무슨 운명이었는지 그 날 해질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날 아버지가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루사이 죽고 태어난 것이다. 백 씨는“마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생과 사가 서로 연결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라며 숙연해 했다.

현재 광양시 독립 유공자 추모탑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형래 씨는“유공자들 후손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그나마 우리처럼 유공자로 인정된 경우는 덜 힘들지만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남아 있는 유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유공자를 찾는 노력을 많은 사람들이 해줬으면 한다”고 부탁의 말을 했다. 백형래 씨는 현재 중마동에서 백마회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