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나는 북소리에 광양의 흥을 돋아보세”
“신명나는 북소리에 광양의 흥을 돋아보세”
  • 귀여운짱구
  • 승인 2007.12.12 20:19
  • 호수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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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버꾸놀이 열두 마당을 완성한 양향진 명인
 
한 손에는 두툼한 북을, 한 손에는 채를 쥐어 잡고 판을 휘어잡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새색시처럼 넘실거리는 춤사위와 장단으로, 때로는 심장이 터질 정도로 장단을 휘몰아치며 구경꾼들을 압도한다. 잠자코 구경하고 있던 구경꾼들이 신명나는 굿판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현란한 춤사위와 소리가 휘몰아칠수록 ‘얼씨구’하며 구경꾼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는 들썩거리고 함께 어울린다. 광양버꾸놀이 열두 마당을 완성한 양향진(44) 명인. 자칫 잊힐 뻔 했던 우리 전통 풍물을 재현해 전국 곳곳으로 버꾸놀이 문화를 퍼뜨리고 있다.

‘버꾸’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버꾸의 어원은 현재로서는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흔적으로 남은 경우가 소고를 지칭할 때 버꾸라는 말을 쓰고 법고(法鼓)라는 북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양 명인은 “버꾸라는 말을 좁게 보면 악기를 지칭할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음악, 놀이, 제의 등을 포함하는 한 판의 풍물굿을 지칭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좁게 보면 북놀이고 넓게 해석하면 풍물놀이라는 것이 양 명인의 설명이다. 
양 명인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1997년 전국 최연소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으로부터 한국농악명인에 선정됐다. 2001년에는 한국문예진흥원으로부터 신진전통예술인에, 그 이듬해에는 제2건국위원회로부터 전통예술신지식인에 뽑혔다.
남들이 평생 동안 하나도 이룰까 말까한 대업을 그는 일찌감치 세 번이나 인정받으며 풍물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94년에 우리문화연구회를 만든데 이어 96년 광양버꾸놀이보존회를 만들어 버꾸놀이를 시연하고 가르치고 꾸준히 연구했다.
 
 
아버지는 나의 스승
 
양향진 명인에게 굿판은 삶 그 자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장단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3남2녀 중 장남인 그는 4~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풍물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마치고 귀가하는 시간이 지나도 오시지 않으면 어머니가 저를 보내 아버지를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저 역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부자가 한바탕 놀음에 푹 빠져 있을 때가 많았지요. 허허” 그는 아버지가 북사위를 다루면 바가지를 꼬챙이로 두드리면서 장단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을 매료시키는 춤사위와 북을 다루는 현란함으로 놀이판을 주도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던 양 명인은 ‘아버지는 스승 그 자체다’고 회고한다. “어릴 때부터 이 문화에 친숙했어요.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말씀은 안하셨지만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둘씩 배웠지요.” 아버지의 장단에 젖어 살았던 그는 20대에는 또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북 뿐만 아니라 대금, 피리, 기타 등 여러 악기를 다루는 만능 재주꾼이었던 양 명인은 대학 재학 중 보컬그룹을 결성해 기타리스트로서도 활동을 했다. 그는 동서양 악기를 두루 만지면서 리듬 감각을 익혔다. 이뿐만 아니다. 학창시절 뮤지컬을 맡는 등 음악과 관련된 문화에 다재다능한 솜씨를 선보였다. 그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다보면 악기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춤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서서히 잊고 있었던 우리 가락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북 명인들에게 하나둘씩 배우기 시작했다. 굿하는 곳이나 풍물소리가 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메모와 녹음을 하며 하나둘씩 채록했다. 또한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가 옛 장단을 찾아내는 등 발품을 팔아가며 광양버꾸놀이를 선보였다.
“명인전이나 초대전 등 공연을 할 때면 아버지는 멀찍이 제 공연 모습을 지켜봅니다. 공연이 끝나면 ‘왜 그것밖에 치지 못하느냐’며 질책이 잇따랐지요. 아버지를 따라가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버꾸놀이 “섬세한 표현이 매력”
 
하고 많은 풍물 중 광양버꾸놀이는 왜 그의 삶을 좌지우지 했을까. 양 명인은 “광양버꾸놀이가 다른 곳과 달리 북을 놀리는 섬세함에 있다”고 강조한다. “북채를 잡고 돌리는 손목 각도에 의해 사람 몸도 움직입니다. 사방팔방으로 북을 돌리며 한바탕 벌어지다 보니 버꾸놀이는 팔 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쓰임새가 남아있어요.”  
 
양향진 명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북을 어깨에 메고 치는 것이 발달했다고 한다. 양 명인은 “예전에는 북의 테두리(각)를 치며 북의 장단과 어울렸으나 지금은 사물놀이 등을 통해 장구 등 부분 악기가 잘 발달한 까닭에 각을 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양 명인은 “버꾸놀이는 ‘딱’하고 각을 메기고 누벼치는 기교가 전국 어느 지방 북놀이에도 찾을 수 없는 가락이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발 디딤으로 춤사위의 묘미가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한 마당을 펼치는 것이 광양버꾸놀이의 특징이다.
“푸지다고 설명해야 하나요? 광양버꾸놀이는 판을 벌이는 동안 시간, 풍물 인원, 가락 등이 매우 푸집니다. 신명이 절로 날 수 밖에 없지요.” 그는 신명나고 푸진 광양버꾸놀이를 관객들과 함께 즐기다 보면 북의 기운을 구경꾼들이 받아 흥이 전이된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지역에는 광양버꾸놀이를 연행하고 있는 인원이 400명이 훨씬 넘는다. 양 명인은 각 읍면동에 풍물단을 12개 만들어 버꾸놀이를 전수하고 있다.
또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광양버꾸놀이를 전파하고 있다. 양 명인은 “전국을 다니다 보면 광양버꾸놀이가 광양의 문화산업이라는 칭찬을 듣고 있다”며 “욕심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버꾸놀이를 확산시켜가고 있다”고 웃었다.
 
비좁은 연습 공간, 버꾸놀이 현실 안타까워
 
현재 (사)한국농악보존회 광양시지회장과 (사)광양버꾸놀이보존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양향진 명인은 풍물단원들이 마음껏 풍물을 연희하고 행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줬으면 한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현재 문화재청에는 광양버꾸놀이와 양 명인에 관한 자료가 등재돼 광양버꾸놀이는 한국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내정된 상태다. 양 명인은 그러나 “이에 따른 시설은 너무나 열악해 버꾸놀이 명성과는 달리 변변한 연습 공간 하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현재 옛 광양읍청사 맞은편 3층에 버꾸놀이 연습 공간이 비좁게 자리 잡고 있다. 협회 측은 우리지역 폐교를 활용해 연습 공간을 마련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양 명인은 “사곡초교가 위치, 교통 등을 고려하면 적당한 연습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사곡초교가 아직 매입 전에 있고 타용도 전환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며 “시를 설득해 연습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고 밝혔다.

광양버꾸놀이는 또한 도지정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지만 이에 따른 행정절차를 밟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 양 명인은 “학자들이 관련된 학술지에 버꾸놀이에 관한 논문 수록을 완료한 상태다”며 “전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으로부터 광양시에서 도지정 문화재 신청서류가 접수되면 우선 검토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다.
양 명인은 이에 지난 6월 이성웅 시장에게 이 같은 사안을 설명하고 시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서류신청이 되지 않아 결국 도지정 문화재 등록은 해를 넘기게 됐다.

그는 “도지정 문화재로 등록시키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데도 광양시는 신청서류만 접수시키면 바로 지정될 일인데 지금껏 대책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양 명인은 “내년 1월부터 바로 서류접수를 시작하고 민속 문화 발굴 용역사업을 추진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명인은 이와 함께 △광양농악 경연대회를 관내 읍면동 농악단의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버꾸 협회에서 추진할 것 △시립 농악단을 구성해 시민화합 축제 및 전통문화 창달에 노력 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속적인 관심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생업에 지쳐 졸린 눈을 비비며 제 강의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단원들, 한바탕 신명나게 우리 멋을 마음껏 즐기는 시민들을 보면 힘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