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유적지 체계적 관리 시스템 마련 시급
우리지역 문화유적지 체계적 관리 시스템 마련 시급
  • 이수영
  • 승인 2006.10.20 15:12
  • 호수 1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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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리부서 신설· 지방학예연구사 특별 임용해야
관내 문화유적들이 비틀거리고 있다. 송천사지와 지계사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미 10여년 전에 순천대박물관 조사팀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유실이나 파괴, 도난의 우려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방치되는 동안에 유물은 유출되거나 반출 등의 시련을 겪고 있다.
 
광양시에 이를 관리할 전문가 1명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광양시가 이를 방치하는 동안 지계골의 부도는 외지인에게 팔려나갔고 지계사지 부도 하석대는 수풀에 덮힌채 수백년동안 방치돼 있다.
 
또한 송천사지는 발굴을 미루는 동안 절터 대부분은 산장이나 개간된 논으로 변해 전면적 발굴은 힘든 상황이 됐다. 아울러 송천사지 일원에 자리하고 있던 각종 부도와 석조(石槽), 맷돌 등은 한 산장에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순천대 박물관팀은 지난 93년 광양군의 문화유적에 대한 보고서에서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에 있는 신석기시대 패총은 전남에서 몇 안되는 신석기 패총으로 앞으로 발굴조사 등을 통해 그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고, 이에 대한 행정 차원의 보존대책이 절실하며 그 성격이 규명되면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지석묘에 대해서는 당시 농경지정리로 지석묘의 파괴가 극심해 광양만의 배후지역으로 지형 형상변경이 심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보존대책 강구 절실 △봉강 지곡리 각비 가군 지석묘와 옥룡 산남리 남정 가군 지석묘는 전남지방의 지석묘 중 1990여 군집 지역에서 30여기 이상 되는 곳이 64개 지역으로 40여기 이상인 광양은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로 지정 신청해 보존 △원삼국시대의 패총인 봉강면 석사리 옥현 패총은 남해고속도로변으로 구릉의 사면에 위치해 건물이 들어설 경우 완전 파괴될 수 있어 발굴조사 요청되며, 구릉 정상부에서 주가지가 발견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점에서 원삼국시대의 사회나 문화상을 밝힐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 된다고 제언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이미 12년 전이나 20여년전부터 우리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적을 복원·관리·보존할 것을 주문했지만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뤄진 보고서는 말 그대로 보고서로만 그친 채 책장에서 현재까지 사장돼 있다.
 
기자는 지난 주 모처럼의 휴가기간을 이용, 옥룡의 송천사지와 진상면의 지계사지를 답사해 우리지역 문화유적 등의 관리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취재 중 유적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광양신문은 광양시가 지금부터라도 우리지역 문화유적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을 촉구한다. 우선시돼야 할 것은 문화재계 신설이다.
 
 다음으로 강원도 평창군처럼 지방연구직공무원(지방학예연구사) 특별임용을 주창한다. 그것만이 우리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귀한 삶의 자취이자 후손에게 길이 대물림할 영혼을 담은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양시의 각성을 촉구하며 본지가 답사한 우리지역 문화유적을 독자들에게 화보로 내 놓는다. <편집자 주>
 
학사대
옥룡면 동곡에 위치한 학사대는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동복에 유배되었던 초계최씨(草溪崔氏)의 시조. 자 경앙(景仰). 호 신재(新齋). 1504년(연산군 10) 생원(生員)이 되고 1513년(중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수찬(修撰)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후에 사간(司諫) ·지평(持平)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동복(同福:和順)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난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 등과 함께 호남의 3걸(傑)로 알려졌다. 이런 최산두가 어린시절 10년동안 수학했던 자연암굴은 세월을 흐르는 동안 지금은 이처럼 흙 등으로 메워져 있다.
 
맷돌
송천사지에서 발견된 맷돌은 93년 당시 순천대박물관팀에 의해 2개로 파악됐지만 현재 1개는 온데간데 없고 이처럼 맷돌1개가 한 산장 부지에 안내문 하나없이 자리하고 있다.
 
나뒹구는 와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송천사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1759) 등의 사서에 등장한 것으로 봐서 18세기 중엽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한때 폐사됐다가 이후 19세기 읍지(邑誌)에 등장해 중창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송천사는 1950년대 또다시 폐사돼 지금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는데 아직도 와편(瓦片)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송천사진 석조
큰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도록 만든 석기로 큰 절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그릇 따위를 닦을 때 흔히 쓴는 이 석조는 당시 논두렁에 방치돼 있다가 한때 순천의 고수집상에게 도난당했으나 경찰의 수사로 3일만에 되찾아 현재는 한 산장부지에 놓여 있다.
 
화재에 그을린 바위들
송천사가 화재로 소실됐다는 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이처럼 붉게 탄 돌들이다. 송천사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송천사지 돌확
돌로 만든 절구인 돌확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만든 것으로 당시 스님들이 저녁을 짓기 위해 보리쌀을 돌확에 갈았던 기구다. 이를 미뤄볼 때 송천사는 분명 규모가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옥봉당 부도
옥봉당 부도(玉峯堂 浮屠)는 현재 옥룡면사무소에 방치돼 있다. 20여년전 송천사 절터 뒤편에 붕괴된 채 방치되고 있다가 당시 외지인이 싣고 가는 것을 주민들의 신고로 되찾아 이곳에 둔 것이다. 지금도 유출될 소지는 다분해 관리가 절실한 실정이다.
 
지계사지 맷돌
현재까지 진상면에 위치한 지계사지 일원에서 발견된 맷돌은 2개다. 하지만 이중 하나는 계곡 인근에서 이처럼 방치돼 점점 훼손돼 가고 있다.
 
옥계석?
탑은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뉘게 된다. 탑신부 즉 기단부 위 옥계석 중앙에 사리를 모시는데 본지가 최초 보도하게 됐다. 향후 탑을 만들때 사용되는 옥계석으로 밝혀질 경우 우리지역이 소중한 문화유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수영 기자
 
입력 : 2005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