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은 시아버지 같은 분
법정스님은 시아버지 같은 분
  • 박주식
  • 승인 2010.03.18 09:47
  • 호수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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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사람들-홍쌍리 매실 명인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법정스님 무소유 중에서>

불교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앞장섰던 법정 스님이 지난 11일 열반에 들었다. 법정스님은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때론 사회를 깨우는 ‘죽비소리’가 되어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던 큰 스님이었다.

법정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스님의 입적을 누구보다 애도하는 이가 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청매실 농원의 홍쌍리 매실명인이다. 스님과 인연의 시작은 35년 전 매화꽃을 보러 다압을 찾아온 스님을 만나면서부터. 스님은 매화꽃을 좋아하셨고, 해마다 다압을 찾아 매화꽃과 함께했다.

어느 날인가 스님은 홍쌍리 매실명인을 향해 “저 악산에 매실은 못 따도 꽃 천지를 만들어서 도시사람 마음의 찌꺼기를 다 버리고 갈수 있는 지상천국을 보살님이 한 번 만들어 보세요”라고 제안했다. 당시엔 가파른 경사지 밤 산을 꽃밭으로 만든다는 것은 쉬 엄두를 낼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홍 명인도 ‘나는 못해’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스님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고 마음에 큰 짐으로 자리했다. 결국 명인은 ‘그래 내가 한번 해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아먹고 비탈진 산기슭에 매실나무와 야생화를 심기 시작했다.
변변한 장비도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밤나무를 베어내는데만 꼬박 2년 넘게 걸렸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인간 울타리

힘든 노동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시아버지와 마음 상함이었다. 그렇게 매화를 심고 야생화를 심기를 4년, 비로소 지금의 청매실농원의 첫 모습이 탄생했다. 다시 농원을 찾은 법정스님은 그때서야 “이젠 됐다”라고 하셨다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스님께서 또 한 말씀 하신 것이다. 꽃밭을 만들고 보니 “얼굴은 있는데 턱이 없다”며 산 아래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주문했다. 당시엔 경사지에 다랑이 논이었으니 이곳을 흙을 돋워 평지를 만든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홍 명인의 고민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는 의외의 상황에서 다가왔다. 마침 김대중 대통령이 청매실 농원을 방문하게 됐고 헬기장을 조성한다며 3700여대의 흙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성된것이 지금의 전시판매장과 숙성 항아리가 가득한 공간이다. 스님이 와서 보시고 또 “이제 됐다. 좋은 선물 받았다”고 하셨다 한다.

홍 명인은 “법정스님은 언제나 ‘시아버님’ 같은 존재였다. 스님은 며느리 대하듯이 나를 대하고 나는 딸처럼 스님을 따랐다”며 “언제나 꽃이 피면 기다려지던 분들이 한분한분 떠나가니 허전한 맘이 한량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때마침 스님이 돌아가신 날이 영감님 제삿날이었고. 다비식 날은 시아버님 추모식 날이라 스님의 마지막 모습도 보질 못했기에 더욱 안타깝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스님을 위한 홍 명인의 노력은 스스로 ‘할 짓은 많이 했다’고 표현하듯이 남다름이 많다.

병을 얻어 강원도와 제주도에서 투병중일 땐 편지와 함께 폐에 좋다는 음식과 약을 준비해 스님께 보냈다. 폐에 좋다는 갖은 재료를 배합해 정성으로 고은 조청도 만들어 보냈다.
한 달 전 홍 명인은 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스님은 ‘보살님 편지 보며 눈물이 났다. 이 은공 내가 언제 다 갚고 죽나’하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돼버렸다”고 한다.

재작년 초파일엔 홍 명인이 길상사엘 갔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주변 사람을 밀쳐내고 옆자리를 비워 주시며 애써 명인을 앉히시고 차를 직접 따라주시며 이 보살님이 이런 사람이다 고 자랑하시니 명인은 물론 모든 이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일도 있었다.
그해 가을엔 스님이 청매실농원에 오셔 ‘보살님만 좋은 것 많이 갖고 있지 말고 길상사도 보내라’ 하시기에 40년생 매화나무 5그루와 동백나무를 길상사에 심어드리기도 했다.

또 병마와 싸우고 있던 지난해 스님을 뵈니 ‘인제 울지 말고 살아, 더 용기내고, 우리나라에서는 보살님 농장을 누가 봐도 농가의 대가라 할 것이니’라는 말씀과 함께 ‘올 가을에 갈게’ 라고 하셨는데 끝내 못 오시고 말았다.

홍 명인은 “다 가버리고 나니 이제 꽃이 피면 누가 나쁜 점은 지적하고 좋은 점은 칭찬 해 줄지 아쉽다”며 “스님 말을 예사로 들었다면 지금의 청매실농원은 없었을 것” 이라고 감사했다.
이제 명인은 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붙잡고 있다. 스님께서 늘 머물던 자리 밑에 작은 암자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동안 모두 스님이 시킨 대로 다 했는데 그 말씀만 남아있다.
홍 명인은 “시아버님이 생전에 제일 못사는 절에 시주하라고 하셨고, 그래서 그동안 지역의 작은 암자와 강원도 한 암자의 부처님을 모셨는데 스님 말씀대로 암자하나 들어서면 부처님 또 모시게 될 듯하다”고 한다.

홍 명인은 “스님은 쉽게 대하기 편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누구나 실천 했으면 하는 말씀만 하셨다”며 “악연만 되지 마라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인간 울타리라는 말씀만은 언제까지나 지키며 살겠다”고 한다.
또 “스님은 울타리가 없는 청매실농원을 좋아 하셨고 언제나 각을 짓지 말 것과 모나게 살지 말 것을 강조하셨다”며 “언제나 그리움이 남는 꽃잎 같은 삶을 살다가겠다”는 소망이다.

박주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