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과 함께 추위 참고 매화 보던 시절을 그리워하다
이건창과 함께 추위 참고 매화 보던 시절을 그리워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4.19 09:44
  • 호수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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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14>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는 가족과 친구이다. 가족은 피로 맺어진 운명적 관계라면, 친구는 의지로 ‘선택’한 인위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매천이 선택한 최고의 친구는 이건창이었다. 시골 선비였던 매천은 이건창을 통해 중앙 무대에서 명사들을 만나 세상 보는 눈을 넓히고 인생과 문학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매천은 어떻게 견디어내었을까?

이건창과 편지를 주고받다

매천보다 세 살 위였던 이건창은 15세에 조선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김택영이 고문가 9명을 뽑을 때 당당히 들어갈 정도로 문장력도 뛰어났다. 앞의 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의 벼슬길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는데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그의 곧은 성격 탓이었다.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매천은 곧은 선비 이건창이 마음에 들었다. 1881년, 매천은 자신의 시(詩)를 폐백삼아 이건창을 찾아갔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나 교유하였고, 직접 보기 힘들면 편지를 통해 마음을 나누었다. 매천은 서른 되던 해, 이건창이 보내 준 회답 편지를 받고서는 너무 기뻐 시를 지었다.

重重啓緘押 거듭거듭 봉한 편지를 뜯어보니 歷歷生顧眄 지난 세월 돌아보는 마음이 생기노라 手容紛可 손과 얼굴은 가히 움켜쥘 수 있고 眼勢欲現 눈의 기세는 초연히 나타날 듯하다 가문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과거에 떨어지고 낙향한 매천에게 보고 싶은 친구 이건창이 회답 편지를 보내주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거듭하여 편지를 읽으며 이건창과의 추억을 떠올리니, 눈앞에 벗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 듯하였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매천과 이건창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늘 마음만은 함께하는 ‘신교(神交)’를 나누는 사이였다.

이건창의 부음을 받아들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다

1898년 가을 어느 날, 매천은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막역지우(莫逆之友) 이건창이 지난 6월 18일 연관(捐館, 살던 집을 버린다는 뜻으로 귀인의 죽음을 의미)하여 이미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놀라 어안이 막히어 가을 하늘을 쳐다보며 뜨거운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마침 이건창과 더불어 절친한 친구였던 김택영도 와병(臥病) 중이어서 부고를 전해줄 이가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이건창을 만난 지 어언 육 년이나 지났다. 이건창은 1891년 한성부 소윤으로 재직할 때, 외국인의 서울 가옥과 토지를 매점(買占)하는 일을 막기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청국의 압력으로 이듬해 보성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매천도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상중에 있었으나, 상복을 입은 채로 보성으로 달려가 이건창을 위로하였다. 그 때가 1893년 가을이었다. 이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연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平生熱淚師兼友 평생의 뜨거운 눈물은 스승 겸 벗이 되었고 千古英靈月在天 천고의 영혼은 달이 되어 하늘에 있네 大叫秋燈狂欲絶 가을 등불 아래 울부짖어 미칠 듯 애절하니 抽刀割盡匣中絃 칼 뽑아 거문고 현을 모두 끊어 버렸네

시에서처럼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건창을 먼저 보낸 슬픔을 표현하였다. 거문고의 달인이었던 백아가 자기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 종자기의 죽음에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정말 깊이 이해하고 아끼는 친구를 가리켜 ‘지음(知音)’이라고 하는 말이 생겨났다. 이건창은 매천의 지음이었던 것이다.

천리 길을 달려가서 이건창을 조상하다

1899년 3월, 사십대 중반이 된 매천은 비쩍 마른 몸을 이끌고 이건창을 조상하기 위해 벗 윤태경, 윤윤백, 최형국과 함께 광양에서 강화도까지 육백 리 길을 떠났다. 남원·전주·연산·계룡산을 지나고 금강을 건너 마곡사 등을 거치면서 한양에 입경하였다. 성균관 유생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이후 십 년 만에 다시 온 한양이었다. 시심(詩心)이 발동한 매천은 ‘입경사(入京師)’를 지었다.

十年重到漢陽城 십년 만에 다시 한양성에 들어서니 惟有南山認舊靑 오직 남산만이 예전처럼 푸르르네 夾道琉璃洋燭上 좁은 길 유리창엔 전등불이 켜져 있고  橫空鐵索電車鳴 하늘 가로지른 전선 따라 전차 소리 요란하네 梯航萬里皆新禮 배를 타고 멀리서 온 이들은 신식예법 행하고 屋纛千秋始大名 임금님은 천추에 황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가지셨네 却笑杞人痴滿腹 쓸데없는 걱정으로 가득했던 이 몸이 우습구나 彼天安有驀然傾 저 하늘이 어찌 갑자기 무너지리오

남산만이 의구하고 나머지는 예전의 한양이 아니었다. 전기가 들어와 밤이 대낮처럼 환하고, 전차가 요란히 달리고, 임금은 황제가 되었고, 많은 제도가 서양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천은 신식문물로 가득 찬 한양의 낯선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라가 서서히 망해가는 징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리라’는 안타까움을 안은 채 가던 길을 재촉했다. 김포를 거쳐 마침내 강화도 사곡에 도착하여 이건창의 영궤(靈, 빈소)에 엎드려 곡하였다.

이건창이 만년에 병이 들었을 때 매천을 몹시 그리워하여 운명의 순간에도 ‘매천, 매천’을 불렀다는 얘기를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이곳에서 5일을 머무르며 젊은 날 서울 남산의 석자나 되는 눈 속에서 이건창과 함께 ‘추위 참고 함께 매화 보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만단의 깊은 회포를 풀었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