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상소문「언사소」를 쓰다
매천, 상소문「언사소」를 쓰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4.26 09:36
  • 호수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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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16>

상소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 왕조시대 정치의 꽃이다. 그 내용은 진실하고 분명하고 논리적이어야 했다. 만약 허튼 소리를 하거나 내용에 잘못이 있는 경우 귀양을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에게 직언하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여겼던 신하들은 서슬 퍼른 정의감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상소문은 ‘정의(正義)의 문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누구보다 정의를 사랑하였던 매천은 『매천야록』에 최익현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상소문을 실었으며, 마침내 본인도 개화의 요체가 될 핵심과제 9조목의 상소문「언사소(言事疏)」를 작성하였다.
 
‘말(末)’보다는 ‘본(本)’을 우선해야 한다

1899년, 매천은 나이 45세 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그 첫머리에서 몸이 가루가 되어도 갚을 길이 없는 넉넉한 임금의 은혜에 감읍하는 예를 갖추었다. 다음으로 갑오년(1894년) 이후 지난 5년 동안 백 가지 법을 고쳐 중흥하는 터전을 만듦이 아름다운 부분도 있지만, 개화의 근본이 아닌 말단만을 추구하여 나라가 위중한 상태에 빠졌음이 걱정되어 상소를 올린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매천이 판단한 당시 조선의 상태는 이러하였다.

오호라, 지금 우리나라의 형세가 비유하자면 병이 깊어 죽음이 드리워진 사람과 같으니, 오장육부가 병들고 수족이 마비되며 입이 막히고 눈이 아찔하여 병상에 누워 있으나, 아직 목숨은 끊어지지 않아 헐떡이며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같음입니다. 유부와 편작과 같은 중국 고대 명의의 손이 아니면 결코 기사회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세기말의 조선은 무조건적인 쇄국과 대책 없는 문호 개방의 갈등 속에 올바른 개화의 방향을 찾지 못한 혼돈의 상태였다. 환자로 비교하자면 임종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매천은 유부와 편작 같은 명의가 된 심정으로 조선을 기사회생시킬 수 있는 처방을 고민하였다. 그 처방은 바로 ‘올바른 개화’였다. 매천이 생각하는 ‘올바른 개화’란 다음과 같았다.

대저 개화(開化)라 하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개물화민(開物化民)’을 일컫는 것이다. 개물화민을 어찌 그 근본이 없이 이룰 수 있겠는가? 어진 이를 친하게 하고 간사한 이를 멀리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사용함을 절약해서 신상필벌 하는 것 등은 그‘본(本)’이 되는 것이며, 군대를 단련하고 기계를 이롭게 하며 물건을 판매하는 것 등은 ‘말(末)’을 이르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 일련의 개화 정책들을 지켜보면서 올바른 개화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였고, 이에 대한 생각이 명확해졌다. 매천은 개화를 『주역』에 나오는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 즉 ‘모든 사물의 궁극을 밝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게 하고, 백성을 변화하게 하여 풍속을 이룩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즉 제대로 된 개화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말(末)’보다는 정신적인 ‘본(本)’을 우선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9개조의 시무책을 제시하다.

매천은 개화의 ‘본’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9개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 언로를 개방하여 명맥을 통하게 하소서. 국가에 있어서 언로는 사람에게 호흡과 같은 것으로, 의리를 아는 선비를 간관(諫官)으로 선발하여 여론을 국정에 반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2. 법령의 신뢰를 회복하여 군중의 의지를 바로잡으소서. 사회 질서를 위해 상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법령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고, 아울러 현 법령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로 잡아 신뢰를 회복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3. 형장을 엄숙히 하여 기강을 진작시키소서.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이를 다스려 나가려면 형벌을 엄중히 하여 사회 분위기를 쇄신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절약과 검소를 통해 재원을 넉넉하게 하소서. 백성의 구휼이나 국방비 등 반드시 필요한 지출은 어쩔 수 없지만 불필요한 지출은 금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5. 민씨 일족을 몰아내서 백성의 공분을 풀어주소서. 신상필벌의 원칙 아래 척신 민씨 일족을 쫓아내어 그들의 횡포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풀어주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6. 과거를 엄격히 하여 재주 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소서. 갑오개혁 때 폐지된 과거제를 다시 부활하여 엄격히 실시하고, 반드시 과거 합격자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여 벼슬길을 맑게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7. 직임기간을 오래하여 맡은 일에 책임지게 하소서. 관리들이 그 직임에 오래도록 있게 하여 그들이 포부를 충분히 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서,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8. 군제를 바꾸어 변란의 싹을 자르소서. 군사력의 양성이 급선무임을 전제하고, 임오군란 후 크게 문란한 군기를 엄중히 세워 전란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9. 토지대장를 정리하여 국가예산을 넉넉히 하소서. 갑오개혁 이후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이 관리들의 무능과 부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 공정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대장에서 누락된 은결을 찾아냄으로써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매천의 상소문은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었다

황현이 개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시한 9개 조항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대부분 기존의 제도를 보다 합리적으로 운영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매천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와 급진적의 개화파의 중간 지점에서 내수자강에 입각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전통에 중심을 둔 점진적인 현실 개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매천의 시무책은 상공업 문제보다 농업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중농적 실학사상과 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자유전’의 원칙 아래 자영농의 육성을 통한 개혁을 지향하였던 유형원(1622~1673)과 정약용(1762~1836)의 토지개혁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토지 중심의 개혁 방안은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즉 향리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근검을 실천하고 독서와 저술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였다.

매천의 개화관은 전통적인 유학자들의 경세론과 비교해 보면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미흡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매천이 근대성에 있어서 부족한 이유는 민족 자주의 문제를 근대화보다 더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한말 지식인의 고뇌와 염원이 반영된 개혁안이라 할 수 있겠다.

매천의「언사소」는 국왕에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매천의 상소문은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고만 셈이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