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창간호는 흑백ㆍ8면…500호 발행까지 14년 ‘여정’
첫 창간호는 흑백ㆍ8면…500호 발행까지 14년 ‘여정’
  • 이성훈
  • 승인 2013.02.04 10:25
  • 호수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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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발행주기 들쭉날쭉…2004년 11월 재창간 이후 정착 지발위 선정, 윤동주 백일장 대회 개최, 다양한 기획기사 발굴


광양신문이 지령 500호를 발행했다. 광양의 지역신문에서 지령 500호를 발행한 신문은 광양신문이 유일하다. 광양신문 창간호부터 펼쳐보면 지역의 역사, 인물, 당시의 사건사고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광양신문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9년 태동하기 시작했다. 99년 10월 11일 전남도에 신문 등록을 하고 11월 6일 창간호를 발행하며 지역 소식을 담기 시작했다. 초대 발행인은 남기호 전 전남도의원이고 편집주간에는 허선식(광주매일 기자), 편집국장에 차범준 씨가 맡았다.

당시 지면은 대판 8면이었다. 창간호 1면 기사는 ‘광양시민상 진월면 안선남 여사 선정’이다. 500호 특집을 위해 창간호의 주인공인 안선남 여사를 수소문 했으나 몇 년전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창간호 1면 헤드에는 ‘광양신문 창간! 21세기가 원하는 지역신문이 되겠습니다’라는 머리제목으로 시민들에게 광양신문 창간을 선언했다.

창간호에 맞춰 광양인물 열전 기획기사를 게재, 1호 인물로 매천 황현 선생을 다룬 것이 눈길을 끈다. 요즘은 컬러 신문이 대세이지만 당시 창간호는 흑백신문으로 발행했다. 2호는 2주 뒤인 99년 11월 20일 나왔다. 남기호 초대 발행인은 2호 신문 1면 발간사를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신문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발간사를 일부 발췌해보면 광양신문을 앞으로 △정직하고 공정한 취재를 통해 폭넓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여론의 장을 만들 것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신문을 만드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지역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신문을 만든 것은 현재 광양신문이 문화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하고 문화정책을 이끌어냄으로써 그 약속을 이어가고 있다. 3호는 12월 2일 발행됐으며 초창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주간ㆍ격주간을 반복하며 불규칙적으로 발행됐다. 2000년 1월 18일자 7호 신문이 광양신문 새천년 들어 첫 번째 발행한 신문이다. 2000년 11월 23일에는 창간 1주년 특집호(27호)를 발행했다.

1주년 특집호는 서예가 청원 홍은옥 선생의 창간 1주년 휘호만 특집 내용으로 실려 있을 뿐, 창간과 관련한 특집 지면은 없다. 당시 취재 인력 부족과 지역신문에 대한 사람들의 낯선 인식, 규칙적으로 발행하지 못하는 현실 등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2000년에는 ‘광양시민 칭찬 릴레이’라는 캠페인을 펼쳐 지면을 통해 시민들을 만나는 기획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광양신문은 이후 격주간으로 꾸준히 발행되다 2001년 11월 15일 창간 2주년 특집호(46호)를 발행한다. 2주년 특집호 역시 8면이었지만 1주년 특집호와 달리 ‘광양신문 창간 2주년을 맞이해 새롭게 도약한다’는 임직원의 결의가 들어있었다. 2002년 4월 8일 남기호 발행인이 사퇴하고 허선식 편집인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취임하며 조직에 변화가 생겼다.

2002년 6월 1일자(56호) 신문에는 6.13 지방선거 특집을 1면에 담아 시장, 도의원, 시의원 출마 후보들을 게재하며 선거 특별판을 마련했다. 당시 시장 후보를 살펴보면 이성웅ㆍ김현옥ㆍ김옥현ㆍ이강사 후보 등 4명이다. 7월 13일자(제58호) 신문 1면은 이성웅 시장 민선 3기 취임식이 탑기사였다. 이 시장은 2002년을 시작으로 민선 5기까지 내리 세 번 시장에 당선됐다. 이정문 현 의장도 당시 4대 시의회 전반기 의장에 당선됐다. 같은 해 10월 19일 창간 3주년 기념 특집호가 발행(62호)됐다.

창간 3주년 특집호 화두는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광양신문이 되겠다’는 것이다. 2003년 1월 4일 66호 신문이 2003년 첫 신문으로 발행됐으며 같은해 12월 18일 창간 4주년 기념 특집호(80호)를 발행했다.

2004년 11월 재창간, 2005년 100호 발행 

이후 꾸준히 발행되던 광양신문은 2004년 4월 28일 87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지한다. 발행이 중단된 이유는 경영난때문이었다. 누군가 선뜻 지역신문을 이끌기에는 경영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 중단 사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광양신문은 약 5개월을 휴간 한 후, 2004년 11월 6일 김양환 발행인이 취임하면서 재 창간을 선언했다. 재 창간 후 그동안 주간ㆍ격주간으로 발행됐던 광양신문은 매주 독자들에게 배달됐다.

재 창간 당시 임직원으로는 김남준 회장을 비롯해 김양환 발행인, 허선식 편집인, 서순규 이사, 김기현 감사, 이수영 편집국장, 김인수 사진부장, 김정국 문화부장, 이명순 편집기자, 안영배 기자, 변태윤 광고담당 등이다. 광양신문은 같은 해 11월 19일(88호) 재창간호를 발행하고 25일 일반 주간신문으로 등록한다. 2005년 2월 17일에는 100호를 발행했으며 같은 해 5월 2일 인터넷서비스(http://www.gynet.co.kr)를 개시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독자들에게 실시간 뉴스를 전달하고 있다.

독자위 출범ㆍ12면 증면ㆍ지발위 우선지원대상 신문사 선정

2006년 1월 2일 한국 ABC협회에 가입한 광양신문은 3월 20일 지면평가위원회(현 독자위원회)를 출범, 독자들로부터 신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8면으로 이어오던 광양신문은 간헐적으로 12면을 증면하면서 12면 증면 준비를 꾸준히 해왔다. 2007년 1월 4일(194호) 신문부터는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 발행, 더욱더 다양한 소식으로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같은 해 1월 11일 2기 지면평가위원회가 출범했으며 2월 15일 200호를 발행하는 성과를 이뤘다. 11월 1일에는 (사)바른지역언론연대에 가입해 올바른 지역신문으로 성장하기 위한 틀을 마련했다. 2008년 1월 17일에는 2기 지면평가 위원회가 출범했으며 2월 15일 광양시 지역 언론 사상 최초로 지역신문발전위원회로부터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신문사로 선정됐다.

광양신문은 그동안 지발위 대상 신문사로 선정되기 위해 기획기사는 물론, 각종 언론 교육, 지면개선사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광양신문은 2009년 1월 1일 4기 독자위원회를 출범시켰으며 지난 2월 5일 지역신문발전위원회로부터 2년 연속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신문사로 선정됐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4월 2일 306호 지면부터 기존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해 11월 6일 창간 10주년 기념 특집호(336호)를 발행하기까지 꾸준히 여론 선도는 물론 발품 뛰는 기사로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한편 재창간 후 5년간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이수영 기자는 2009년 3월 5일자로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했으며 박주식 기자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이수영 전 편집국장은 “광양의 대표 언론으로서 500호까지 꾸준히 발행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며 “여론을 주도하고 다양한 기획기사를 발굴해 대안도 제시해 여론을 선도하는 지역언론으로서 자부심을 보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2011년 7월에는 신문 판형을 바꾸는 지면 개혁을 단행했다.

1999년 대판으로 발행을 시작한 광양신문이 창간 12년 만에 판형을 바꿔 현재의 베를리너판으로 발행한 것이다. 광양신문이 7월 4일자 제420호부터는 베를리너판형으로 변경하고 20면 증면 발행했다. 광양신문은 단순히 신문의 크기를 바꾸는 작업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색선의 다양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신문으로 거듭나고, 권력의 견제와 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다짐했다.

2012년 변화와 혁신의 시기

2012년 2월 2일 광양신문은 5년 연속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로 선정됐다. 박주식 편집국장은 2월 13일자로 사직했다. 광양신문은 2012년부터 조직 내부도 재정비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11월 5일에는 제487호 창간 13주년 기념 특집호 발행했다. 2013년 1월 25일에는 6년 연속 지발위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로 선정돼 광양신문의 저력과 지역을 대표하는 언론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백일장 대회, 책보내기 운동, 기획기사 발굴

광양신문은 500호를 발행하기까지 다양한 공익사업과 보도를 통해 지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광양신문은 2006년 전라남도광양평생교육관운영위원회와 공동으로 ‘광양시민의 힘으로 광양평생교육관 도서실을 채웁시다’라는 도서 모으기 운동을 전개해 3개월 만에 6000만원에 육박하는 기금을 모았다.

도서 또한 1만7000여권을 모아 평생교육관 종합 자료실을 가득 채웠다. ‘살기 좋은 광양 만들기 운동’의 하나로 책보내기 운동을 펼친 결과 풀뿌리 언론으로서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 올해 5회째를 맞이하는 윤동주 백일장ㆍ사생대회는 지역 문화 예술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광양신문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윤동주와 광양의 인연을 특종 보도, 지역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월면 망덕리의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은 1925년 건립돼 시인의 유고가 보존 된 것으로 건축사ㆍ문학사적인 가치가 있어 현재 광양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광양신문은 지난 2007년 9월 3개시 도시통합의 폐단을 지적, 광양만권 통합에 대한 뜨거운 여론을 일으켰다. 당시 이성웅 시장은 여수문화방송 주최 토론회에 참석, 3개시 통합 MOU를 체결하자는 방안에 공감을 표했다. 당시 상황을 광양신문은 곧바로 지면에 소상히 알려 시민 동의 없는 MOU 체결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후 이성웅 시장은 기자회견과 광양신문에서 주최한 좌담회 등을 통해 3개시 통합 MOU 방침을 철회했다. 여론도 3개시 통합에 반대, 결국 정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시민들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광양신문은 이밖에 도시 디자인, 중국 광양촌 현지 취재, 저탄소 녹색성장 기획 보도, 이순신대교 개통에 따른 지역경제의 영향 등 다양한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어려움 있었기에 500호 발행 가능했어”

남기호 광양신문 초대 발행인

“지역신문이 필요하다는 여론은 있었지만 인식도 부족하고 어려웠던 시절 창간호를 발행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0회를 맞이했다니…”남기호 광양신문 초대 발행인은 “광양신문이 창간 10주년을 훌쩍 넘어 500호를 발행하게 돼 창간 멤버로서 감격스럽다”며 “우리지역을 대표하는 언론으로 우뚝 성장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 초대 발행인은 “당시는 지역신문 시장도 미미했고 누가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많았다”며 “올바른 지역신문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광양신문을 발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초창기 어려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광양신문이 있었다고 본다”며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신문을 발행했다면 광양신문이 지금처럼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남기호 전 발행인은 광양신문이 앞으로 더욱더 치열하고 지역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단순한 지난 이야기, 정보만 담지 말고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이슈를 발굴해야 한다”면서“더욱더 열심히 뛰고 노력해서 지역 언론의 등불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더욱더 우뚝 솟는 신문되길”

허선식 초대 기자ㆍ2대 발행인



광양신문 초대 편집주간이자 기자이며 2대 발행인이었던 허선식 광주매일 기자는 “광양신문을 창간했을 때 매주 신문을 만든다는 부담감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허 기자는 “당시 다른 지역신문도 있었지만 광양을 대표하는 제호는 ‘광양신문’이라는 생각에 남기호 발행인, 차범준 씨와 의기투합해 신문을 발행하게 됐다”며 창간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당시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항상 불안감 속에서 신문을 찍어냈던 기억이 난다”며 “고생 끝에 손에 쥔 신문을 시민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던 추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지역신문이 많이 생기고 취재 시스템도 좋아져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취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광양신문이 6년 이상 지발위 우선지원대상사로 선정되고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자리 잡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허 기자는 “500호 발행에 광양신문 한 가족으로서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며”면서 “늘 정론직필의 자세로 지역의 역사를 담아낸다는 사명감으로 더욱더 열심히 뛰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