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7> 수월정은 언제 건립되었는가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7> 수월정은 언제 건립되었는가
  • 광양뉴스
  • 승인 2016.06.03 21:47
  • 호수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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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수필가
조동래 시인·수필가

이장에서는 수월정이 언제 누가 건립했는가를 직시해 보고자 한다. 이미 언급한 수월정의 개요에 의하면 鄭渫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름 중 한자 渫은 접자와 설자로 읽혀지고 있으나 설로 표현하고 이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 하면 앞으로는 정보화 시대라 컴퓨터를 이용할 텐데 기계에는 설로 입력해야‘설, 渫’자가 나타나고 접자를 입력하면 나타나지 않으니 설자로 활용해야 편의성도 있으며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설자로 읽어야 한다. 


또 다른 기록「수월정은 광양출신으로 선조 때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정설(鄭渫)이 만년을 소일 할 뜻으로 1573년에 세웠던 정자이다. 섬진강의 멋진 풍경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반한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란 가사를 지어 칭송하여 노래했고 조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睡隱) 강항(姜沆)또한 수월정 30詠을 지어 노래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자였다.


현재의 수월정 모습은 1999년 광양시에서 정비하였는데, 정면·측면 1칸 3×3m로 바닥 면적은 9㎡(2.72평)이고 중도리, 초익공, 시모정, 모임지붕 끝 처마이다. 주변 지형과 바람의 방향을 적절히 고려하여 높은 지붕 위 용마루 중앙에 찰주(擦柱)를 설치하여 강화석 절병통(節甁桶)으로 마감했으며 구조적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우아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정자주변에는 섬진강의 이름이 두꺼비 전설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 광양시에서 화강석으로 두꺼비 기단과 나룻배 문양을 모각하여 설치한 섬진강 유래 외, 1971년 정설의 후손(광산 정씨 종중)들이 수월정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碑)가 있다.


간략한 내용은 이른 봄에 수월정에 앉아 주변 산하를 바라보면 매화가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꽃의 일부는 섬진강 맑은 물위로 떨어져 물결 따라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느끼게 한다.」라고 쓰고 - 송강 정철의 수월정기 증 -「달빛이 비추니 금빛이 출렁이며 그림자는 잠겨 둥근 옥과 같으니 물도 달빛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니 곧, 후(侯 = 정설)의 가슴이 맑고 투명한 것과 같다.」이다.


그런데 이 정자를 건립한 연도가 1573년(癸酉)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주목사를 역임한 정설은 1547년(丁未)에 태어나 1643년(癸未, 향년 96세)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수월정을 건립했다는 그해 정설은 26세였다. 설은 선조 6년(1576, 丙子)에 등과했음으로 등과 3년 전에 광양에 와서 정자를 건립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그의 거주지가 불분명하다. 아버지 정인관과 형 정약의 거주는 나주로 돼 있으나 설은 남원으로 표기 된 곳이 있다. 그리고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본인은 학문에 전염할 시기인데, 한가로이 타지에 와서 정자를 세우고 자연을 풍미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회적 정서상 용납 할 수 없는 일을 무모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때가 계유년이라면 아버지 정인관의 나이 80세가 된 해이니 아버지인 인관이 정자를 건립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설의 아버지 인관, 사마방목에 의하면 중종 38년(1543년, 계유, 50세)에 진사가 되고난 후 명종 7년(1552년, 임자, 59세)에 식년문과에 급제 했다. 이 기록에 의하면 50세에 진사가 되고 59세에 급제를 했으니 아리송할 뿐이다. 그리고 전적(성균관 6급 직)ㆍ보성군수ㆍ영천군수ㆍ밀양부사ㆍ장흥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정인관의 관직에 있어 재직기간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아들 설은 향년 96세 때 세상을 떴으니 믿어야 한다. 과거의 제도와 예(例)를 보면 조선조 때 최연소 급제자는 이건창으로 15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황현과 절친했다. 그리고 정시가 아닌 특별시 기노과(耆老科 : 60세 이상만 응시할 수 있는 시험))를 실시했는데, 고종 때 정순교는 86세에 급제했다.
 

또한 현종 10년(1844)에는 83세의 선비 조수남이 급제했으며 비로소 난삼(생원ㆍ진사합격자가 입는 예복)을 입은 사례가 있음을 감안하면 정인관의 급제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흐름을 보면 정자의 건립년도가 계유년이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