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5건) Ebook (3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광양사람, 사진가 이경모를 찾아서 광양사람, 사진가 이경모를 찾아서 광양출신 사진가 이경모 선생은 한국 사진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정작 고향인 광양에서는 전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이경모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잠깐 일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 없는‘소리 없는 외침’에 그치고 있다.광양신문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일을 추진하고자 이경모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가 남긴 카메라와 사진을 통해 이경모가 광양을 넘어 대한민국 사진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명하고자 한다. 향후 이경모를 기념하고 그가 남긴 카메라와 사진을 전시할 수 있는 독립공간 기획 | 김영신 기자 | 2019-10-18 16:55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한 장의 사진은 영원한 역사이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6> 한 장의 사진은 영원한 역사이다 광양에 국보급 사진작가 한 분이 계신다. 기독교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진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 변천사 등 귀중한 자료들을 대량으로 제작하신 분이시다.특히 사진 자료들은 직접 헬기를 타고 항공 촬영하거나 선박, 렌터카를 총동원하여 하늘과 육지, 바다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한 것들이라서 그 기록가치가 더욱 높은 것들이다.그 분은 18살 때부터 사진을 시작해 소위“사진 한 장의 힘은 천 마디의 말보다 더 강하다.”라는 신념을 믿고‘카메라에 미친 사람’으로 통하는 신윤식 작가이시다.그는 필리핀대학교 예술대학 응용사진학 연수,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캘로그칼리지 리더십과정 연수, 조선대학교 최고지도자과정 등을 이수했다.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 (사)전남영상위원회 위원, 한국세계선교협의 광양人 | 광양뉴스 | 2014-10-13 09:50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단재 신채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단재 신채호’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명언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이 현재는 곧 미래에 투영되기에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은유, 풍자한 느낌이라 교육자로서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한다.그래서 금번은 한국 가장 사랑하는 문화 중 하나인 술 문화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술을 먹고 즐기는 데에 있어 지식적인 부분은 중요치 않으나 바르게 즐기며 발전시켜야 될 문화임에는 분명하기에 우리의 생활 문화인 술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즐겼으면 하는 바 이다.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여 농경형 식생활이 형성되었고, 농경에서 산출한 곡류에 자연적으로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을 이용한 술을 담아왔다.우리나라 역사 속에 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삼한시대이다.고구려는 주조기술 칼럼 | 광양뉴스 | 2013-08-18 19:45 “문화 콘텐츠 창출로 창조도시 만들자” “문화 콘텐츠 창출로 창조도시 만들자” 금년은 2012 여수 세계박람회 개최 등으로 광양관광지형의 큰 전환기를 맞았다.우리시가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아트서커스 페스티벌을 개최해 박람회와 상생하는 새로운 지역문화 콘텐츠 창출하고, 창조도시 광양을 만드는데 많은 광양시 관계자들이 뜨거운 여름철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모습을 볼 때 예술인의 한사람으로써 고마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광양시 공무원 관계자들이 창조적 사고로 참신한 아이디어로 ‘아트서커스’라는 신 지역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지속 가능한 국제 문화행사로 유치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21세기 문화관광의 시대를 맞아 ‘굴뚝 없는 산업’이라 불리우는 관광 산업은 전 세계 도시마다 주력 경쟁 키워드로 자리매김 했다.우리시는 산업도시, 항만도시로써 문화도시로 삼기에는 2% 부족한 느낌이다. 세계도시 기고 | 광양뉴스 | 2012-07-30 09:59 “나라를 사랑한 나의 아버지 정귀인” 3·1절을 앞두고 가슴이 울컥해지는 사람이 있다. 순천시 풍덕동에 사는 정용호(84)옹도 바로 그런 이다. 그의 아버지는 1885년 옥룡면 죽천리 죽림마을에서 태어나 해방직후인 1946년에 유명을 달리한 정귀인이다. 정 옹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정귀인은 3·1운동이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뒤 만세운동이 전국각지로 확산되며 광양읍5일장이 서던 4월 1일 서경식(당시 34), 박용래(당시 46) 등과 함께 광양지역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날 정귀인이 “대한독립만세”를 선두에 서서 외치자 광양장에 운집한 군민 1천여 명이 일제히 몰려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광양장은 삽시간에 만세의 함성으로 들끓었다. 이날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정귀인과 서경식, 박용래는 일본 헌병 사회·환경 | 최인철 | 2010-02-25 09:52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