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선점의 원리와 효과
용어선점의 원리와 효과
  • 김정태 진보연대 정책위원장
  • 승인 2009.08.20 09:09
  • 호수 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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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단어가 있어도 적이 먼저 사용하면 잘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인민이나 동무’와 같은 좋은 단어를 북에서 선점하다보니 남에서는 그 단어들을 터부시하게 되고 ‘국민이나 친구’가 대신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용어선점의 원리’이다.

어떤 세력이 특정 용어를 선점하면 그 세력에게 유리할 때가 많다. 용어에 대한 독점적 사용을 넘어 상대 세력을 그 용어의 반대 개념으로 적당하게 색칠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대세력에게 부여된 좋지 않은 이미지는 부정적 언어의 도그마로 인해 어지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 정치적, 역사적 상처로 남는 효과를 가진다.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쳐 ‘민족진영’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세력을 반민족진영으로 몰아붙이기에 성공했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쿠데타 집권을 옹호했던 보수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의 용어를 선점하며  분배와 복지를 주장하는 진보세력을 반자유주의세력,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세력, 나아가 용공세력으로 몰아 일정부분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돌이켜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용어선점 효과를 단단히 누린 결과이다.

정치용어의 의도 제대로 파악해야

정치세력들이 적절한 용어선점 및 사용에 심혈을 기울이는 데는 인간과 언어사이의 불가분의 관계에 기인한다. 인간의 사유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고 사유는 언어의 형식을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인간은 언어의 노예’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언어는 개인을 넘어 집단의식의 형성에도 기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적절한 용어의 선점 및 사용이 자신이 속한 정치세력에게 유리한 국면을 형성해 주는 것을 이해하는 한 정치적 의도속에 제작된 수많은 용어들이 우리에게 제공되리라 예상된다.

미디어법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정치용어속의 구체성은 이제 우리 스스로가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추상적일수록 이익을 보는 정치용어는 미디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국민은 정치세력이 의도한 바대로 앵무새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집단의식을 형성해갈 것이다. 이러한 메카니즘 작동에 대한 정치세력의 강한 믿음이 최근에 벌어진 미디어법사태의 본질이다.

어두운 시기를 잘 보낸 기득권자들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하고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기도하는 용어의 선점 및 사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누가 봐도 회색인 반생태주의자들이 녹색을 선점하며 녹색성장을 주창하고 약육강식의 시장지배논리에 나라의 경제를 통째로 맡기는 경제정책을 ‘선진화’라는 용어로 포장하고, 경찰을 동원한 국가폭력을 ‘법과 원칙’이란 말로 호도하고 있다.
철저히 기획된 용어에 의해 상대세력은 환경보존과 성장을 반대하는 세력, 반자본주의세력, 폭력을 일삼는 집단으로 내몰려는 논리이다.

최근 자유주의진보연합이란 보수단체가 진보용어전쟁에 돌입한 걸 보면 그동안 보아왔던 쏠쏠한 재미의 반증이라 여겨진다. 원칙이란 말 몇 번하고 원칙주의자로 변신한 박근혜의원이 어느새 대세론을 타며 대중의 의식속에 연착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시장가서 떡볶기를 먹고 싶어하는 대통령의 심중도 어느 정도는 헤아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