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발전의 초석 다진 남다른 애향심
광양발전의 초석 다진 남다른 애향심
  • 최인철
  • 승인 2009.09.17 09:26
  • 호수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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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항과 제철산업 입지 결정에 큰 역할

설성 김종호 전 장관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임관한 전형적인 군인출신 인물이다. 보병 제6사단장과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역임하고 소장으로 예편하기까지 줄곧 군인으로서 생을 살았다.

김 전 장관은 1926년 3월 광양읍 목성리에서 부친 김재구와 모친 이소악의 7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승주와 나주, 진도군 등 여러 고을을 옮겨 다니며 자랐고 이후부산 제일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진도보통학교에서 당시 전국적인 명문 가운데 하나였던 부산제일상업학교로 진학한 것은 그가 얼마나 총명했었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이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진학했으며 당시 국내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육관사관학교다. 그는 육사8기생으로 국방대학원 등 주요요직을 두루 거쳤다.

“투철한 애국정신과 대의명분을 좆는 장부의 기개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꾸준한 노력과 다방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등 풍부한 교양, 언행일치 삶으로 실천력을 겸비했다”는 게 그의 추도비문에 적힌 내용이다.

군 시절 그가 부임해 가는 부대에는 군기가 바로 섰고, 항시 모범부대 표창이 뒤따랐다. 파월 한국군을 아무런 차질 없이 철수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공로 가운데 하나다. 군수행정의 새장을 열었다는 게 군인으로서 그에게 내려진 평가다.

군을 예편한 그는 사업가로서 새 인생을 살았다. 사업가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아세아자동차공업회사 부사장, 금호산업 사장 등을 거치면서 새로운 경영모델을 제시했다.

12.12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5.18직후 그를 제20대 전남도지사로 전격 임명했다.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지역사회에서 명망이 높던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군사정권 아래였으나 김 전 장관이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한 것은 이때부터다.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이때부터 남다른 고향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제16대 건설교통부장관 시절 그의 고향사랑은 눈에 띠는 대목이다. 광양읍과 동광양권을 잇는 고삽치도로와 컨테이너전용도로 등은 물론 우리지역 발전을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광양제철소 입지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 광양항 건설의 정책결정도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궁벽한 광양을 세계적인 철강과 항만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진 것이다.

이밖에 광주어린이공원 조성과 완도-진도간 연륙교 건설 등 전남지역 발전에도 큰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현재까지도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88년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나섰다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황색바람에 밀려 낙선하면서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김 전 장관은 1994년 9월 2일 68세를 일기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화랑무공훈장(2회), 보국훈장 광복장 및 을지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청수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지난 97년 9월 광양읍 우산공원에 추모비가 건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