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도에 의적 전우치가 나타났다
태인도에 의적 전우치가 나타났다
  • 최인철
  • 승인 2010.03.18 09:28
  • 호수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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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담은 궁기-명당마을 찾아보기

명당마을

전우치가 광양땅에 당도한 것은 500년 전의 일이다. 그는 땅의 지세를 살피다가 섬진강과 태백의 기운이 바다와 맞닿는 태인도의 풍수를 한 눈에 알아보고 그곳에 궁궐을 짓고 군사를 살펴 장차 의를 행하고 백성을 살피는 본거지로 삼았다.

백운산과 섬진강이 토해놓은 비옥한 토지와 너른 갯벌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해 물산이 크게 번창 했기 때문에 한 눈에 보아도 태인도는 사람이 복을 누리면서 살만 했다. 무엇보다 남해의 끝자락에 위치한 십 수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태인도는 관군의 관심 밖 세상인데다 은둔해 후사를 도모하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가 보기에 도성의 임금은 아첨하는 세도가에 눈과 귀가 멀어 백성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지방의 목민관들은 곡간에 금은보화를 쌓아두기에 급급해 백성의 피를 뽑아 먹는 흡혈귀 같이 제 배를 불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백성의 아내와 딸은 첩으로 삼고 아들은 종으로 부렸다. 은둔생활을 하던 전우치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가슴에 담고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을 결심했다.

무엇보다 개벽의 세상을 꿈꿀 만한 땅이 필요했다. 바다와 산, 강에 둘러싸인 태인도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열쇠와 자물쇠처럼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전우치가 태인도 삼봉산 아래에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아 말을 조련했다. 또 군사를 주둔시키고 부근의 작은 섬들을 봉쇄했다.

화담과의 도술경쟁으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던 전우치가 태인도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섬으로 몰려들었다. 전우치는 남해 각지에서 나라에 바칠 대동세와 호포세 등 삼세를 싣고 떠나는 배들을 부채의 바람으로 요술을 부린 뒤 태인도로 정박시켜 조세를 빼앗아 굶주린 백성의 배를 채워주고 정착을 도왔다.

장내마을

태인도를 거점으로 전우치는 지금의 비행기와 같은 운교를 타고 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백성을 착취한 탐관오리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한번은 전우치가 충청도 어느 고을 지나가다 이곳 수령이 어찌나 탐학이 심하던지 치를 떨만했다. 전우치는 이곳 백성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태인도로 돌아온 그는 묘책을 고민하던 중 태인도 주변의 지세와 섬진강을 한양과 비슷하게 만드는 환술을 썼다. 태인도를 왕궁으로 믿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의 도술은 여지없었다. 섬진강은 한강이 됐고 배알도는 여의도가 됐다. 멀리 태인도에 세운 자신의 궁궐은 왕이 사는 왕궁이었고 태인도 주민들은 도성안 백성이 됐다. 전우치는 왕명을 빌어 남원, 곡성, 구례, 하동 등지에 명해 조곡을 한강으로 가져올 것을 명했다. 순식간에 쌀 수천석이 모였다. 전우치는 수천석의 쌀을 싣고 충청도 백성을 돕는데 썼다.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태인도는 날로 풍성해지고 백성들도 나날이 살이 쪘다.

어느 날 전우치는 중국의 명나라에 황금으로 만든 큰 기둥 ‘황금대량’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우치는 큰 학 두 마리를 타고 명나라에 도착해 명나라 황제에게 옥황상제의 사신을 자처, 황금대량의 상납을 요구했다.

그는 황금대량을 가지고 유유히 태인도로 돌아 왔으나 명황제는 이상하게 생각해 일관을 시켜 쌍학이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 일렀다. 쌍학은 조선 태인도로 향했다. 전우치를 포박하기 위한 일군의 군사가 급히 파병됐다. 그 사실을 안 전우치는 어둠을 틈타 궁궐앞 바다 가운데 있는 뱃사장에 황금대량을 감추었다.
그리고 팥 3되를 가지고 궁궐기둥 주춧돌 밑으로 지네로 변해 숨었다. 태인도에 남아있던 가족과 백성들에 대한 문초가 시작됐다.

하루밤낮만 무사히 경과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니 절대로 나의 행적을 알려 주어서는 안 된다고 전우치의 당부가 있었다. 가족과 백성은 죽기를 각오하고 거처를 모른다고 하였으나 첩은 고문에 못 이겨 자변을 하고 말았다.

관군이 큰 가마솥에 기름을 끊이면서 주춧돌 밑을 발굴해 보니 팥은 병정으로 변해 창을 집고 일어섰다. 전우치가 지네로 변한 것을 알아차린 관군이 지네를 창으로 찍어 기름가마솥에 넣고 끓였다. 그러나 잠시 후 가만솥 지네의 형체는 간곳이 없고 병정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관군이 돌아간 후 전우치는 삼봉산 서편 중턱에 작은 폭포를 이루는 목란천(신골샘)에 나타나 말채찍을 거꾸로 세우면서 이것이 나무가 되어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은 줄 알라면서 “나는 하늘의 명을 어기지 않았으므로 오래도록 살아 죽지 않을 것이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른 뒤 망아지 딸린 백마를 타고 광영을 거쳐 골약 가야산으로 뛰어 사라졌다.

윗글은 태인동 궁기마을에 얽힌 전우치 전설을 대략적으로 재구성해 쓴 글이다. 흔히 가공인물로 알려진 전우치는 조선 중기의 기인이다. 실존인물이라는 뜻이다. 전우치전에 의해 흔히 가공인물로 생각하고 있지만 허균이나 이덕무, 이기 등의 저서에도 전우치의 족적은 뚜렷이 남아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사서인 <조야집요> <대동야승> <어우야담> <지봉유설> 등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전우치는 하늘땅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도술가이자 그는 탐관오리들을 찾아가 그들을 징치하고 재물을 빼앗아 착취당한 백성들에게 다시 이를 돌려주는 의적의 대명사다.

약수터에서 바라본 광영

전설에 따르면 태인도와 전우치의 인연은 각별하다. 전우치에 얽힌 여러 가지 지명들이 수북히 남아 있다. 먼저 전우치가 궁궐을 지었다는 마을은 다름 아닌 김시식지가 있는 궁기마을이다. 성을 쌓았다는 성지는 장내마을 뒤 신보등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곳을 말한다.

그 아래 마을은 담안(지금의 장내마을), 전우치가 말을 조련했다는 조련지는 지금의 질마지(뒷삼봉 남동쪽), 군사가 주둔한 곳은 지금의 군두리(6통)이다. 특히 황금대량을 묻었다는 곳이 명당마을(5통)인데 현재 이곳은 명당산업단지가 조성될 예정으로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지명에서 볼 수 있듯 광양시 지역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또 놀이터로 이용했다는 섬들은 피리불고 놀았다는 서취섬, 북치고 놀았다는 북섬, 춤추고 놀았다는 모래섬, 염소를 길렀다는 넉섬, 기생들이 살았다는 애기섬 등 전우치의 행적을 담은 지명들이 남아있는 것은 흥미롭다.
지금도 섬 뒤 목란천 반석에는 오래된 말발굽이 판에 박은 듯이 나타나 있다. 광영동 수로 입구에 쇳소리 나는 큰 바위가 세운 듯이 놓여 있었고 그 아래 반석에 망아지와 백마의 발굽이 완연하였으나 도로공사를 하면서 파괴되어 형태가 없어졌다. 말채찍을 꼽아 나무가 됐다는 나무가 아직도 도촌마을에 남아 있다.

앞서 인용된 목란천에는 전우치가 평상시 물을 떠먹던 금그릇이 가라앉아 있다고 하나 보이지 않으며 지금도 도촌 사람들이 제사지낼 때는 부녀자들이 목욕재계하고 닭 울기 전후 인적이 고요할 때 길어다 정화수로 사용하고 있다.

김영웅 용지큰줄다리기 보존회장은 “전우치 전설이 영화화 되면서 흥행대박을 터트리고 있지만 정작 태인도와 전우치의 인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며 “가공인물인 소설 홍길동과 심청을 모티브로 지역브랜드화에 성공한 장성이나 곡성처럼 전우치를 광양의 대표인물로 상징화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나가 전우치가 태인도에 살고 있을 때는 태인도는 대인도(大人島)였다. 그러나 대인도는 역모지의 지명으로는 너무 큰 호칭이니 태인도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전우치의 행적과 관련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자료출처 김영웅 용지큰줄다리기 보존회장, 태인동 도촌마을 고 최한원옹 수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