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강제 체결된 ‘겁약’
을사조약 강제 체결된 ‘겁약’
  • 광양뉴스
  • 승인 2010.05.10 09:36
  • 호수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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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18>

한반도 식민 지배를 위한 일제의 침략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러·일 전쟁의 승리 후 외교권 박탈을 위한 을사조약의 체결이었다. 두 번째는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차관 정치를 위한 정미조약의 체결이었다. 마지막 단계가 조선을 완전 병합하는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이었다. 이처럼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제가 조선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온 과정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역사 속에 있을 때,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 처음 시작될 때 그 결론을 예상하기란 무척 어렵다. 과연 매천은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첫 공작인 러·일 전쟁과 을사조약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러·일 전쟁 을사늑약의 전주곡

『매천야록』에는 러·일 전쟁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기록되어 있다. 1904년 2월 일본이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한 것부터 1905년 5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끈 일본 해군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파한 쓰시마(對馬島) 해전까지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내용까지 미국신문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매천이 러·일 전쟁을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당시의 조정 대신들과 일반민들의 러·일 전쟁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아주 낮았다.

이때(러·일 전쟁)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말하기를,‘그래도 왜인은 사람 축에 드나 아라사 사람은 짐승 같으니, 만약 아라사가 일본군을 이기고 남쪽까지 석권할 것 같으면 우리 인종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하고 모두들 일본이 승리하고 아라사가 패망하기를 빌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처에서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운반하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일본이 나쁜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나쁜 생각은 이미 개전하던 날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일본인은 사람 같지만 러시아인은 짐승 같다고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였던 것에 대해, 매천은 이와 같은 생각이 일본의 야심을 미처 깨닫지 못해 생긴 일이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매천은 “장차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유구(琉球, 오키나와)나 안남(安南, 베트남)의 경우와 같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러·일 전쟁에 대한 매천의 판단이 정확하였음은 훗날의 역사가 입증하였다.

러·일 전쟁은 을사늑약의 전주곡이었다. 역사가 입증하듯, 러·일 전쟁은 두 나라의 동아시아 식민지 분할 전쟁이었으며, 나아가서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후에는 프랑스의 자본이 개입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국제전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의 승인 하에 조선을 식민지로 차지하기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을사오적 가장 악독한 도적이다

1905년 11월 17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문의 원본을 보면, 조약의 이름이 없다. 조약문을 졸속으로 작성하여 강제로 체결하다 보니 이름도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강압적인 ‘늑약(勒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은 당연히 정상적인 절차를 통한 합법적인 ‘조약’이라고 주장한다.『매천야록』에 기록된 조약이 체결되는 경위를 보면,

1905년 10월 21일(음력, 양력 11월 17일) 밤, … 구완희 · 박용화 등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궐 담장 둘레로 대포를 설치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임권조·장곡천호도 등과 함께 곧바로 어전에 들어가 5개 조의 새 조약을 꺼내 놓고 임금에게 도장을 찍도록 강요하였다. … 임금이 끝내 날인하지 않았으며 한규설 또한 날인하지 않았다. 날인한 자는 외부대신 이하 각부 대신들뿐이었다.

을사조약은 고종이 날인하지 않은 강제로, 그리고 불법적으로 체결된 ‘늑약’-매천은 을사조약을 ‘겁약(劫約)’이라 표현하였다-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구절이다. 을사오적의 긴밀한 협조 속에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은 비통함에 빠져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았으며 그 정경의 참담함은 바로 전쟁을 치른 듯하였다. 이등박문은 군대를 파견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며 을사오적의 집을 보호하였다. 사람들이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부대신 권중현을 지목하여 오적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오적들은 너무나 당당하였다.

내부대신 이지용은, “나는 오늘 최명길이 될 것이다. 국가의 대사를 우리들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병자호란 때 청과의 강화를 주장하였던 최명길에 비유하여 자신들의 매국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극치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진다.『매천야록』에는 이등박문이 을사늑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본에서 300만 원을 가지고 와서 을사오적을 비롯한 정부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조약을 성사시켰음이 적혀 있다. 당연히 민심은 오적들의 행위를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으로, 그것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악독한 도적으로 취급하였다. 조병세와 최익현 등 많은 유림들은 오적 처형의 상소문을 올렸으며, 많은 지사(志士)들은 오적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변란의 소식을 듣고 <오애시>를 짓다

매천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는 바로 붓을 들어 3수의 시를 지었다. 그래서 제목도 <문변(聞變, 변란의 소식을 듣고)> 이었다. 그 중 세 번째 시를 옮겨보면,
洌水呑聲白岳嚬 한강 물 흐느끼고 북악산이 찡그리는데紅塵依舊簇簪紳 세도가 고관들은 띠끌 속에 의구하네 請看歷代姦臣傳 청컨대 역대의 간신전을 훑어보소 賣國元無死國人 나라 팔아먹지 나라 위해 죽은 간신 없다네

나라가 망해 산천이 울부짖어도 권력가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나라 팔아먹은 간신들만이 설치는 세상을, 매천은 통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서울에서 들려오는 애국지사들의 순절 소식은 슬픔을 북받치게 만들었다. 두보의 <팔애시(八哀詩)>를 모방하여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자결 순국한 민영환, 홍만식, 조병세를 애도하고 평소 존경하던 최익현과 이미 저승에 가 있는 벗 이건창을 생각하였다. <오애시>의 주인공 중 살아있는 분은 최익현이 유일하였다. 매천은 평소 최익현을 너무나 존경하였기에, 망국의 시점에서 최익현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지혜를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최판서익현(崔判書益鉉)>의 말미에 “원컨대 공께서는 일찍이 자애하시어 조금이라도 저의 의혹을 풀어주소서”라고 쓰고 있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