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섬진강 차나 한잔 마시고 다시 흘러가시게”
“이보게 섬진강 차나 한잔 마시고 다시 흘러가시게”
  • 최인철
  • 승인 2010.05.10 09:38
  • 호수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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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압면 백운산 기슭 차잎 따는 맑은 소리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일천강의 물 위에 떠 있고
산악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 달이고 향 사루는 곳에 옛 길이 통했네”

한국 선의 중흥조로 꼽히는 경허스님의 다시(茶詩)다. 허공이던 곳이 본래 이름이 없음으로 차와 향도 그 허공에 맞닿아 있음을 노래한 시다. 예로부터 차는 곧 선(禪)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선의 화두 가운데 하나인 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가 있다. 당나라 선승 조주가풍에서 나온 말로 ‘차나 한 잔 마시게’는 오늘 날에도 불가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야말로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극치로 꼽힌다.

차는 맑고 차다. 그리고 향기는 그윽하다. 향의 여진이 만만찮아서 차를 음미하는 으뜸으로 여향을 꼽는다. 여향을 따라가다 보면 고요한 심리적 평온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차는 선의 가풍뿐 아니라 오래도록 한민족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그 면면은 오늘날에 다시 후인들의 손끝에서 피어나고 있다.

최근 선이 대중화되면서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 다 선이 일면이 들어있다고 하면 과언이 될까. 음식에도 선식이라 하고 글씨도 선서가 있고 그림도 선화요 춤도 선무, 무술도 선무다. 하다못해 아파트의 구조도 선(禪)스타일이다. 우리나라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세계적 추세다. 서양에는 화장품을 만드는 데도 선의 정신으로 만들었다는 선전문구가 오른다. 하지만 선의 세계화에도 차는 일등공신이다.

선은 맑고 밝고 간결하고 소박하고 탈속하다. 그리고 고요하다. 자연스럽다. 조작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고 겉치레나 불필요한 것이 일체 없어서 절제의 극치다. 깊고 유현하다. 이는 차의 성품과 일통한다. 그러면서 어딘가 모르게 위엄이 있다. 이러한 정신이 모든 분야에 깃들어 있으면 선의 그림자라 일컬어도 무방하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자신의 깊은 선심을 드러내는 일은 선의 당연한 일상사다. 차를 마시려면 먼저 동병에 좋은 물을 떠다가 물을 끓여야 한다. 여기서 차물은 매우 중요하다. 차의 향기를 온전히 품어낼 수 있는 깨끗한 물이 차향을 가름한다.

물이 끓는 소리가 마치 소나무에 바람이 불듯하다가 다시 전나무에 비가 내리는 듯하다. 그 이상을 끓이면 안 된다. 그 때를 기다려서 곧바로 물 끓이던 동병을 얼른 죽로에 옮겨 온다. 그리고 지금 막 따서 법제를 한 첫차, 즉 춘설차의 차 잎을 넣는다. 그리고는 물이 끓던 소리도 잦아들고 그 소리를 듣던 사람의 마음도 함께 고요해지면 그 때에 가만히 찻잔에 부어 마신다.


무엇보다 선심이 젖어든 한 잔의 춘설차 맛은 세상의 것이 아니다. 급하고 요동치는 마음의 밑동을 부여잡고 고요하다. 은은하면서 그 세계는 깊고 움직임이 없으나 막혀있던 오감을 깨우고 오감 너머에 있는 정신의 영역에서 이는 차고 맑은 바람이 정수리 끝에서 불어온다. 이것이 선차다. “물 끓던 소리도 잦아들고 그 소리는 듣던 사람의 마음도 고요해지면”이라는 선시 한편이 전해주는 말에 뜻이 깊다. 대저 선차를 하는 사람들은 외적인 격식보다는 이 말에 마음을 써야 한다. 마음이 여기에 이르고 나면 그 때는 어떤 행동도, 어떤 자세도 모두가 선차가 된다.

섬진강에 가 보라. 차를 따는 손길이 분주한 요즘이다. 한 잎 한 잎 따는 정성이 차를 만드는 시작이다. 무릇 ‘일창이기’니 하여 차잎을 따는 일에도 법도는 있는 내세우나 법에 너무 사로잡히면 사가 깃드는 일이다. 정성은 하늘도 움직이는 법이니 그게 최고의 법도다.

백운산 계곡의 오염되지 않는 자연과 섬진강을 끼고 있다. 강우량이 충분하고 반 음지로 일조량이 적어 차나무가 자라기는 매우 적합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광양에서 차를 외면하던 시절에도 백운산 작설차는 이미 차의 가치를 알고 차를 대농사로 여겼던 인근 하동 화개에서 대량으로 차를 구입해 갔던 게 바로 백운산 녹차다.

백운산 녹차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부터 자생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모진 바람과 겨울 내내 푸르름을 간직하다 이듬 해 4월 초순 봄의 향기와 같이 여리고 부드럽고 싱싱하게 자란 새순을 세상 밖으로 밀어 올리니 그 향이 은은하다. 이를 옛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온 수제(덖음)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농가가 늘면서 백운산 차의 영역도 인근 화개의 차의 가풍을 잰걸음으로 뒤쫓고 있다.

백운산 작설차는 백운산 계곡에서 자생하는 어린 새순을 곡우 전에 일일이 손으로 채엽한다.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온 가공기법으로 만들어내 최고의 맛과 향을 내며 차중 최고급 제품으로 손꼽힌다. 보통 이것을 우전이라 일컫는데 그리 상관할 일은 아니다. 차는 우전이나 세작, 중작, 대작이라는 이름과 상관없이 따는 시기에 따라 그 은은함이 서로 다른 법이니 애써 상품가치만 높게 만든 세상이 뭐라 부르고 중히 여기던 그냥 차로만 보면 될 일이다.

백운산 기슭에 자리한 다압면에는 12개 마을 250농가에서 작설차를 재배하고 있다. 또 옥룡사에는 동백 숲과 함께 곳곳에 차밭의 흔적이 남아있고 중흥사, 성불사 등지에도 야생하는 차밭이 남아있다. 광양의 차는 도선국사의 흔흔한 손길이 남아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다만 크게 성행했을 것으로 확증이 가는 광양의 차밭 대부분이 밤나무로 대체되면서 그 풍모는 예전만 못하게 됐을 것으로 추정되니 그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백운산 기슭 아래 옛 도선차의 가풍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으니 백운산 차의 가풍이 대가의 풍모를 지니게 될 날도 그닥은 멀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