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대한매일신보를 직접 구독하다.
매천, 대한매일신보를 직접 구독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6.07 09:38
  • 호수 36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2>

을사 늑약 체결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항일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이라는 두 흐름으로 정리된다. 안타깝게도 당시 두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독립 운동 방법론의 차이로 갈등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러나 매천은 방법의 차이보다는 독립이라는 목표의 같음에 초점을 맞추어 두 운동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사실상 국권을 강탈당한 상황에서 매천의 판단 기준은 우선 나라를 살리는 것이었다. 당장 의병으로 봉기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것도 중요하고, 장기적으로 계몽 운동을 통하여 국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계몽 운동의 대표 선수라 할 수 있는 ‘언론 운동’에 대한 매천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황성신문을 사방에서 다투어 구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3년에 설치된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漢城旬報)’로 열흘 마다 발간되는 순한문체 신문이었다.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覺五郞)의 기술적 협조로 발간되었던 이 신문은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6년 ‘한성주보(漢城週報)’로 다시 태어났다. 전신인 한성순보와는 달리 주간지로 바뀌고 문체도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였던 한성주보는, 1888년 박문국이 폐지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박문국을 설치한 지 수 년이 지났으나 실용적인 일을 한 것이 없고 헛되이 국고만 낭비하였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박문국을 폐지하였다고 한다. 급진개화파와 일본의 합작에 의해 만들어진 두 신문에 대하여 매천 역시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또한 국한문혼용체로 바뀌면서 순한문체에 익숙한 매천과 같은 유학자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로(言路)의 필요성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매천이었다. 1899년 작성한 「언사소」의 제1조에서 ‘언로를 개방하여 명맥을 통하게 하소서’라고 주장하였다. 국가에 있어서 언로는 사람에게 호흡과 같은 것으로 여론의 국정 반영이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황성신문에 대한 관심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매천야록』에 황성신문에 대한 기록에 있다.

「황성신문」이 비로소 창간되었다. 국한문을 혼용하여 문장을 만들었는데, 시정(時政)을 논박하고 인물을 비판하는 데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사방에서 다투어 먼저 사보려고 하였다.

1898년, 남궁억이 창간하고 박은식 ? 장지연 등이 주필로 활동한 황성신문은 구한말에 항일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매천도 황성신문을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결을 결심하는 날 밤에 송진을 태워가며 본 신문도「황성신문」이었다.

1903년의 『매천야록』기록에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간행한 「황성신문」,「제국신문」외에도 외국인이 관리하는「한성신보」,「대동보」,「기독교보」등과 각 지방지까지 소개되어 있다. 매천의 언론, 특히 신문 매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강한 항일 기사를 싣다.

1904년, 영국인 배설(裵說, E. T. Bethell)이 간행한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강한 항일 기사를 실었다. 그래서 매천은 「대한매일신보」의 애독자가 되었다. 신문 구독과 관련하여 매천이 제자 왕수환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내가 일찍이 여러 사람에게서 신문을 빌려 본 것이 이미 10년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구독을 시작했다고 하루아침에 형에게 아끼려는 생각을 가지리오. 다만 내어 주고 받아들임과 관리하는 것이 자못 마음이 쓰이는데 세상에 남의 책을 빌려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나처럼 세밀하고 정확한 사람은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형은 모름지기 잘 알아서 빌려 준 자로 하여금 눈썹을 찡그리지 않도록 하여 주시오. …… (대한매일)신보 열 장을 부치니 돌려보내라고 독촉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오.

구한말 지방에서 신문을 구독한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매천도 다른 사람의 신문을 무려 10년 넘게 빌려서 보다가, 이제 겨우 직접 구독을 하게 되자 제자로부터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편지이다. 돌려달라는 독촉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마지막 부탁이 재미있다. 매천은 관보와 신문을 역사 기록의 기초 사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신문을 꼭 보관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매천은 「대한매일신보」를 좋아하고 신뢰하였다.『매천야록』에 기록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칭찬의 기사를 보면,

각 신문들은 의병을 일컬어 폭도니 비류니 하는 데 이르렀으나, 오직 (대한)매일신보만은 당당히 ‘의병’이라 일컫고, 논조가 조금도 굽힘이 없어 일본의 죄악상을 파헤치고 들은 대로 다 폭로하였다. 그래서 이 신문을 다투어 구독하여 한때 종이 값이 올랐으니, 일 년도 못 되어 발행 부수가 7, 8천 부에 이르렀다 한다.

오직 「대한매일신보」만이 의병을 ‘의병’이라고 보도하고, 일본인들의 죄악을 폭로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지고 있던 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의 보도에도 앞장섰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의연 금액을 날마다 보도하였으며,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즉 의연금의 총수집처를 대한매일신보사에 두기도 하였다.

일제,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항일 신문을 탄압하다.

일제는 1907년 <신문지법>을 제정함으로써 항일적인 신문에 대한 탄압에 들어갔다. 이 법은 처음에는 국내에서 발행되는 민간 신문만을 그 단속 대상으로 하였으나, 1908년 4월에 그 법의 일부 조문을 개정함으로써 미국과 러시아의 한국인 교포들이 발행하는 신문뿐만 아니라 영국인 배설 명의의 「대한매일신보」도 그 단속 대상에 포함시켰다.

포와(布?, 하와이)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들이 우리나라가 장차 일본에게 합병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일본 황제 및 송병준 ? 이완용에게 전보를 보내 따져 물었는데, 「대한매일신보」는 그 전보 내용을 게재하였다. 일본은 ‘치안방해’를 이유로 내부(內部)로 하여금 신문을 압수케 하였다. 이때 신문은 수십 종이 있었으나 모두 머뭇거리며 아첨을 일삼았는데, 오직 「매일신보」만은 왕왕 비분강개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포와 교민이 간행한 「신한보」와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교민이 간행한「해조신문」은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때때로 외세를 배격하는 논조가 실리자, 일본은 곧바로 ‘치안방해’로 걸어 발매를 금지하였다. 그런 까닭에 뜻이 있는 인사들은 서로 말하기를, “치안방해라는 네 글자가 실로 망국의 부적”이라 말했다.

일제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민족지의 유입을 막고, 국내에서 발행하는 배설의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할 목적으로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치안방해’ 혐의로 항일 신문들을 탄압하였던 것이다. 결국 「대한매일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들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야말로 ‘치안방해’라는 네 글자는 언론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었고, 언론의 사망은 곧 나라의 망함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한편, 「대한매일신보」의 강한 항일 기사에 불만을 가진 일본은 동맹국이던 영국에 압력을 가하여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 차례나 베델을 재판정에 세웠다. 두 번째 재판에서  3주 금고형을 선고받은 그는 상하이로 압송되었고 그 곳에서 형기를 마쳤다. 평소 독한 브랜디와 담배를 즐기던 베델은 재판 스트레스가 겹쳐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매천야록』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1909년) 5월 1일, 「대한매일신보」사장 영국인 배설이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장사지냈다. 배설은 『대한매일신보』를 수년 동안 간행하면서 외세를 배격하는 데 많은 힘을 썼으므로,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영국인 배설이 보여준 한국을 위한 여러 가지 언행은 일반 국민들뿐 아니라 매천도 감동시켰다. 매천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와 관련된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석 달 후 배설의 처가 영국으로 돌아간 기사도, 1910년 5월 양화진에 그의 묘비를 건립한 기사도 『매천야록』에 있다. 매천은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배설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역사 기록으로 보답하였던 것이다. 배설의 묘비문에는 그의 유언 ‘나는 죽지만 원하건대 신보는 길이 계속되어 한국 동포를 구하라(我則死 願申報永生 救韓國同胞)’라고 적혀 있었다.

일진회, 친일 기관지 국민신보를 창간하다.

그러나, 항일신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06년 1월, 당시 친일의 선봉에 섰던 일진회는 「국민신보」를 창간하였다. 『매천야록』에 관련 기사가 있다.

일진회는「국민신보(國民新報)」를 창간하였다. 그 의론의 주지는 모두 일본이 내비치는 뜻을 받아들여 서로 간에 호응해서, 당시 사람들은‘기관신문(機關新聞)’이라 일컬었다. 민간인들은 그 신문을 싫어하여 구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관리에게 억지로 나눠주고 신문 값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기관신문’을 자발적으로 구독하는 사람은 없다. 일진회가 발행한「국민신보」가 일반 독자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하자, 강제로 구독하게 하는 장면이 너무나 실감나게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이후 매천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던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 두 자를 떼어내고「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 신문’을 만들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구한말, 한양에서 6백 리나 떨어진 구례에 사는 매천에게 신문은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신문을 통하여 세상의 소식을 접하고, 신문의 기사를 사초로 삼아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매천에게 바른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는「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신문이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다행이었던가.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언론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