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하다.
매천, 사립 호양학교를 설립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6.14 09:25
  • 호수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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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3>

을사늑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개화 지식인들은 활발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계몽하여 애국심을 높이고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실력을 길러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계몽 운동가들이 역점을 둔 것은 바로 교육 운동이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오산학교, 대성학교, 보성학교, 휘문의숙, 진명여학교 등을 비롯하여 5천여 개의 학교가 전국에 설립되었다. 구례에서도 매천을 중심으로 한 계몽 운동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양영학교의 기문을 작성하다.

1890년대 중반부터 신학문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매천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신학문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전주에 설립된 양영학교(養英學校)의 교무를 담당하였던 동향 후배 고용주(高墉柱, 1865~1930)의 부탁을 받고 기문(記文)을 작성해 주었다. 이「양영학교기」에는 신학문 수용과 교육에 대한 매천의 변화된 의식이 잘 담겨 있다.

나라가 스스로 망하게 내버려 둘 수 없고, 백성이 스스로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마땅히 분발하여 힘을 다해 대적하여 약육강식의 상태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야 가히 사람이라고 천하에 외칠 수 있다. 그 방법은 진실로 무엇이겠는가? 저들의 부강을 본받을 수밖에 없고, 부강해지려면 저들의 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 학교를 새로이 하는데 서로 화답하고 호응하는 까닭이다.

나라의 멸망을 막고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서양의 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양영학교 설립의 당위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양영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유학임을 강조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학문이 뒤섞여 이교(異敎)가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돈독하게 유학을 믿은 것이 5백년이나 되어 마음 속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비록 부녀자라 할지라도 모두 공맹(孔孟) 이외에는 다른 도가 없음을 알고 있다.

매천은 신학문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조선이 5백 년 동안 지켜온 공맹(孔孟)의 도가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이 변하지 않듯이 도(道) 또한 변하지 않는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매천의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입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신학문으로 기울었고, 매천의 생각도 점점 유학보다는 신학문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훗날 그의 제자였던 김상국이 매천의 <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일찍이 한 제자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너보다 많으나 서양의 厚生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법을 배워 쇠한 우리나라의 시국을 구하는 데 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서양학을 배우는 것이 선비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하자,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더럽고 더러우나 나라의 더러움보다는 더럽지 아니하다.”라고 하시니, 이것으로 선생의 나라를 위한 충성과 의리가 어떠한 줄을 충분히 알겠도다.

서양의 정신과 학문이 비록 동양에 비해 천박하다고 할지라도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는 동양보다 앞서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매천이 동도서기적 입장에서 개화 지식인의 입장에 더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호양학교 설립을 위한 모연소를 쓰다.

1907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 당하는 시기에 매천은 직접 사립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1908년, 자신이 살고 있는 구례 월곡 마을에서 남쪽으로 2Km 아래에 있는 지천리 지하 마을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하였다. ‘호’는 방호산(지리산의 다른 이름)을, ‘양’은 남쪽을 의미한다. 지천리는 지리산 노고단 자락의 서남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매천을 비롯한 왕석보의 후학들과 지천리의 유지들은 호양학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매천의 문인들인 박태현, 권석우, 왕재소, 권봉수, 왕수환 등은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중 박태현이 초대 교장, 왕수환은 2대 교장, 왕재소는 3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호양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재원은 주로 지천리 주민들의 전답과 현금 등의 출연에 의지하였다. 당시 의연금을 모금하기 위해 매천이 지은 ‘사립호양학교 모연소(私立壺陽學校 募捐疏)’가 『매천집(梅泉集)』에 실려 있다.

“생각건대, 호양학교 건립의 노고는 진실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방해를 물리치매 이미 온갖 재난의 고역을 겪었고, 경영에 힘을 다 바쳤으나 …… 결국은 가루 없이 떡국을 만드는 격이니,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 옥을 쪼다 그친 듯 어린이들을 가르칠 방도가 없으니 안타깝고, 교원들에게 급여를 못 주게 되니 선생 노릇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 오늘날 우리의 신학문에 대한 발원은 단적으로 모든 국민을 위한 소망이었습니다. …… 장차 훌륭한 후손을 남기고자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을 낯이 두껍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 서양의 호걸들을 보더라도 그 누가 학교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사립학교 건립과 운영의 보편적 어려움은 재정난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한다. 재정난으로 교원들에게 급여를 제대로 못 줄 형편이다 보니 뜻 있는 사람들의 후원을 기대하면서 모연소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난보다 더 힘든 것은 일본의 방해와 탄압이었다. 호양학교의 설립을 전후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본은 대한제국으로 하여금「사립학교령」을 제정 ? 공포하도록 강요하였다. 1908년 8월에 반포된「사립학교령」에 대하여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학부대신 이재곤이 중앙과 지방에 사립학교령을 반포하였다. 이때 사립학교가 군마다 다투어 설립되었는데 각종 교과서의 편찬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에 망국을 통분하여, 책을 엮어 말을 이어감에 있어 왕왕 비분하고 격동한 뜻을 부여하여 사람을 감동케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싫어하여 이재곤에게 제재를 가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무릇 교과서 가운데 내용이 애국에 관계있는 것은 다 거두어 소각하였으며 다시 관리들에게 교과서를 편찬하게 하니, 다만 공손하고 유순한 태도로 책을 만들어 가르치게 하였다.

이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당시 다수의 사립학교들은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반면 이를 싫어한 일본은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고취할 가능성이 있는 교과용 도서를 압수 ? 소각하는 한편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립학교들은 일제의 각종 탄압과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에 주력하였다.

호양학교의 교육내용 역시 항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호양학교에서 사용하였던 태극기와 비천상이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학교종과 제1회 졸업생 중에 왕경환의 장남 왕재일(왕수환에게 양자로 감)이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10여 년 동안 수감된 사실 등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호양학교,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다.

1910년 매천이 순절한 후, 호양학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그리고 재정난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편지글이 남아 있다. 1912년 8월 13일(음력), 매천의 제자였던 김상국이 왕수환의 편지에 답한 글을 보면

부탁한 교사는 박봉이라 구하기 어렵습니다. 대개 인심이 박해서 일어만 조금 알면 문관시험을 보아 면장과 서기로 모두 나가니, 천리 밖 10원 월급에 누가 응하겠습니까? 단념하십시오.

아마, 구례에서 호양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왕수환이 서울에 있는 김상국에게 일어 교사를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김상국이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단념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우대 받는 일제 시대에 서울에서 천리 나 떨어진 궁벽한 구례의 시골 학교에서 10원 월급을 받고 근무할 일본어 교사는 없다는 것이다. 1911년 왕수환의 교원 임명장을 보면 월봉이 7원이었는데, 1년 사이에 월봉 10원으로 43%나 인상되었지만 여전히 박봉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왕수환의 동생 왕경환이 1914년 1월 21일(음력) 형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부탁하신 교원 일은 창산(김상국의 호)의 편지에서 이미 아셨을 것으로 거듭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만 어학 교사를 불가불 변경해야 한다면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속히 도모하시어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자격과 학문은 묻지 마시고, 만약 초빙해 올 수만 있다면 실로 호양학교의 처음 있는 교사 자격이 될 것이며 크게 흥분하는 바일 것입니다. 어찌 다행하고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호양학교는 열악한 재정과 교사의 부족으로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3 ? 1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일제는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각 지역에 공립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근간이었던 학교를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호양학교도 1920년 3월 공립 광의초등학교의 개교로 폐교되고 말았다.

호양학교, 옛 터에 복원되다.

호양학교는 이렇게 일찍이 폐교되고 말았으나 황현의 호양학교 설립의 정신은 해방 후 방광초등학교의 설립을 통하여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광초등학교는 1945년 10월 15일 구례군 광의면의 유지들이 매천 황현의 유지를 받들어 호양학교의 정신을 계승하고 광복을 경축하기 위하여 광의면 수월리에 설립한 학교이다. 그러나 최근에 학생수가 급감하면서 결국 1999년에 폐교되고, 현재는 지리산 학생 수련장 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2006년 6월 호양학교는 폐교된 지 86년 만에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옛 호양학교터에 복원되었다. 구례의 호양정신선양회가 주축이 되어 구한말 구례의 신문화 학교 설립 운동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였다. 아쉬운 점은 건물은 복원되었지만, 그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미흡하다는 점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을 때, 매천은 호양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구한말 호남에서 구례의 호양학교는 창평의 고정주(高鼎柱)가 설립한 ‘창평의숙(昌平義塾)’과 쌍벽을 이루는 신문화 학교의 효시로 간주되었고, 설립 이후 10여 년 간 다수의 애국적인 인재들을 양성 ? 배출하였다. 매천은 교육이 희망임을 실천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