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의 순절, 수많은 기록으로 더욱 빛나다
매천의 순절, 수많은 기록으로 더욱 빛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7.05 09:20
  • 호수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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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6>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나라를 잃는 치욕의 순간에 일본의 종노릇을 거부하고 죽음으로써 항거한 28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아! 반만 년 오랜 문명국이 섬 도적놈의 식민지로 편성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만대에 사무칠 아픈 역사가 아니랴. 이때 나라 사람으로 비분강개하여 순절한 이가 많았다. ……

그 가운데 전해 들어 겨우 약간 명을 알 수 있다. 즉 금산 군수 홍범식,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진사 황현, 환관 반학영, 승지 이재윤, 승지 송종규, 판서 김석진, 참판 정 모(某), 의관 백 모, 의관 송익면, 정언 정재건, 감역 김지수, 감찰 이 모, 영양 유생 김도현, 동복의 송완명, 태인의 김천술·김여세, 익산의 정동식, 선산의 허 모, 문의의 이 모, 충주의 박 모, 공주의 조장하, 연산의 이학순, 전의의 오강표, 태인의 김영상, 홍주의 이근주 등 28명이었다.

그 밖의 죽은 사람들도 전해지는 이야기는 있으나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순절한 분들 중에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금산 군수 홍범식, 구한말의 친러파 이범진, 안동의 선비 이만도 등의 순국은 제법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분들의 순국은 안타깝게도 겨우 이름만 남기거나 아니면 역사 속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런데 조선후기 ‘마을 마다 고을 마다’ 있던 진사에 지나지 않았던 매천 황현은 많은 이들에게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기억되고 있을까?

매천, 문장과 절의가 일치하다.

매천의 순절은 다른 선열들의 순국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매천이 순절한 다음 해인 1911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남긴 유고를 정리하여『매천집』을 간행하고자 전국의 여러 선비들에게「통문(通文)」을 발송하였는데, 그 중 한 구절에 매천 순절의 특별한 점이 잘 설명되어 있다.

예로부터 절의(節義)를 가진 선비는 그 수가 손꼽을 수 없이 많으나, 문장(文章)까지 겸한 사람은 그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매천의 제자들이 꼽은 스승의 가장 위대한 부분은 문장과 절의의 일치였다. 매천의 절의, 곧 순절은 그의 문장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그의 문장은 장렬한 순절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문장이 말(言)이라면 절의는 행(行)이다. 매천은 언행이 일치하였다. 언행일치는 기본적인 인간된 도리이지만, 세상에 기본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매천이 남긴 문장은 시문(詩文)과 역사(歷史)이다.

매천은 따뜻한 감성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탁월한 시인이었고, 비판적 입장에서 자신이 사는 시대를 정확히 기록한 위대한 역사가였고, 위기의 시대에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지조 높은 선비였다. 즉 매천은 문(文)·사(史) · 절(節)이 일치하는 고결한 식자인이었다.

동생 황원, 형 매천의 순절을 널리 알리다.

일제는 한일합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이에 항거하여 순국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만 들리면 그 집안사람들을 위협하여 부고 보내는 것을 막았다. 각 신문사가 이미 폐쇄되었고, 서로의 대화도 금지되었으므로 누가 순절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경술국치 이후에 순국한 열사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수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매천에게는 형의 순절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야무지고 올찬 동생 황원이 있었다.
매천의 순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하여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제는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 군인과 의사를 매천의 집에 파견·검시하여 병사한 것으로 속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동생 황원은 “너희는 무도하게 이미 우리 조국을 멸망시키고서 다시 의사(義士)의 이름을 없애려 하느냐? 내 차라리 너희와 싸우다 지하에 계신 형을 따라 죽을지언정 의사의 이름을 없애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하고 항의하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일제의 만행을 의연히 물리친 동생 황원은 형의 순절을 사방의 지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뿐만 아니라 황원은 형의 유언에 따라 그가 남긴 시문을 모아 『매천집』과 『매천속집』을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매천의 순절과 문장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황원이 충실한 거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장지연, 매천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싣다.

한편, 1910년 10월 11일「경남일보」 ‘사조(詞藻)’란에 ‘매천선생절필 4장 전진사 황현(梅泉先生絶筆 四章 前進士 黃玹)’이란 제목으로 매천의 순절 소식과 「절명시」4수가 실렸다. 「경남일보」는 1909년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지이다. 당시「경남일보」의 주필 장지연은 매천의 순절을 애도하는 다음의 글을 썼다.

숭양산인(崇陽山人, 장지연의 호)이 말씀드립니다. 지난해 (매천)선생께서 나(숭양산인)에게 서신을 보내주시면서 더없이 장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속의 묵은 때를 벗고 지팡이 짚고 남쪽으로 놀러가 산수 간에 계신 선생을 찾아뵙고 좋은 말씀 얻어듣고 함께 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었는데, 무엇을 도모하셨기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까? 유시를 세 번 반복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에 가득합니다. 아! 선생님께서는 깨끗한 몸으로 영원히 가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매천과 장지연은 서신교류를 통해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런 매천의 순절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매천의 절명시를 보도하였고, 이 이유로 「경남일보」는 일제로부터 정간 처분을 당하여 약 열흘 기간 동안 신문 발행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경남일보」에 대한 탄압은 매천의 순절이 단순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닌 강력한 항일운동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만해 한용운, 황매천의 순절을 애도하다.

동생 황원의 노력과 「경남일보」의 보도로 매천의 순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였고, 그 중 156인의 애사(哀辭)와 39인의 제문(祭文)은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매천의 순절이 가지는 사회적 관심과 파장을 보여준다. 그 중 만해 한용운은「곡황매천(哭黃梅泉)」이란 만시(輓詩)를 남겼다.

就義從容永報國 의로써 조용히 나라 은혜 갚으려고 一瞑萬古劫花新 한 번 죽자 만고에 겁의 꽃이 새로워라 莫留不盡泉坮恨 저승에서도 다 풀지 못할 한 남기지 말라 大慰苦忠自有人 그 괴로웠던 충절 위로할 사람 절로 있으리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