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집』 발행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매천집』 발행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7.12 09:23
  • 호수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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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7>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트 에코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녀를 낳는 것과 책을 남기는 것 두 가지라고 하였다. 매천은 자녀들도 훌륭하게 키웠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도 남겼으니, 죽음을 두 번이나 극복한 셈이다.

그 중에서도 매천에게 절대 생명을 부여한 것은 그의 시문을 엮은『매천집』과 『매천속집』, 그리고 그의 역사 기록을 묶은『매천야록』과『오하기문』등이다. 일제시대에 간행된『매천집』과 『매천속집』은 그 발행 과정뿐만 아니라 배포 과정, 이후의 독자들의 반응까지 모든 과정이 편지글로 남아 있어 더욱 소중하다.

일제시대, 『매천집』 발행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천의 유언에 따라 동생 황원과 제자들은 장례식 이후 곧바로 그의 시문을 모은 『매천집』 발행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서슬 퍼런 무단통치가 막 시작된 시기에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순절한 매천의 책을 발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천집』발행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던 시대였다. 1911년 음력 2월 12일, 당시 서울에 있던 매천의 제자 김상국이 구례의 왕수환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매천 선생의 유집을 간행한다는 것은 내 뜻에 바로 맞으나 출판하려면 반드시 모처(조선총독부)의 승인을 얻어야 할 것인데 승인은 된다고 기약할 수 없고, 가령 승인한다 할지라도 선생님 행장 중에 큰 절의는 한 글자도 삽입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어찌 여산(廬山, 중국의 명산)의 진면목을 잃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중대하여 한 번 하면 두 번 하기 어려우니 천천히 기회를 기다려 완벽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견은 어떠하십니까? 김상국은 매천의 유집을 간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주변의 친한 동지들과 상의도 하고, 1910년 최남선(崔南善) 등이 창립한 한국고전 간행단체인 조선광문회를 통한 출판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매천 시문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작문 교과서를 작성해 보려는 노력도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 허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왕수환에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때를 기다려보자.’고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1911년 8월 6일에는 구례의 황진모가 왕수환에게 편지를 보내, “제 옅은 소견으로는 매천의 시문을 유산석실(중국 호남성에 있는 천 권의 책이 숨겨져 있는 석실) 같은 곳에 보관하였다가, 천하가 태평해진 후에 발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하였다. 급히 서두르다 낭패를 만나는 수가 있으니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조금 느슨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이었다. 실로 1910년대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군홧발로 짓밟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으니 『매천집』발행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김택영, 『매천집』 발행을 스스로 맡다.

매천 유집의 발행 시기와 방법을 두고 고민 중이던 구례의 여러 선비들에게 중국 회남의 김택영이 매천 유집의 간행을 제안하는 편지와 함께 성금 5환을 보내왔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았다. 그 때가 1911년 음력 윤 6월 22일이었다. 매천 선생의 유집(遺集)은 마땅히 간행하여야 하겠으므로 나는 지위가 낮고 덕이 박한 것을 잊어버리고 감히 적은 물건을 먼저 내놓습니다.

약한 새의 힘으로는 바다를 메울 수 없으나, 개미로 하여금 보배로운 구슬을 꿸 수 있듯이, 다행히 이 뜻을 체득하여 여러분들과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 간행 부수는 재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하여지므로 당장 그 부수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삼가 고국의 유민(遺民) 여러 부형에게 부칩니다.

김택영의 이 편지가 계기가 되어 구례 지역의 매천 제자 왕수환·박창현·윤종균·권봉수·이병호 등은 『매천집』을 간행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1911년 8월, 이들은 호남을 비롯한 각지의 선비들에게 『매천집』 간행을 안내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다음과 같은 통문으로 삼가 우리 유교를 숭상하는 여러 선비에게 알려 드립니다. 황매천 선생의 문장과 절의는 저같이 높은데, 다만 세상의 도의가 어지럽고 인사가 바빠 아직까지 상자 속에 있어 빛을 내지 못하니, 진실로 선비들의 탄식하는 바입니다…금년(1911) 봄에 동지 몇 사람이 간행할 일을 의논하였으나, 다만 자금이 부족할 뿐 아니라 출간 인가를 얻기 어려워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만 리나 떨어진 중국 회남 땅에서 객지 생활에 겨를이 없으면서도 편지로 간행을 청할 줄 알았으리오.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 하시니, 이가 바로 창강 김택영이십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화장여(和長輿) 같은 수전노가 되지 말고, 마문연(馬文淵) 같은 은혜를 베푸셔서 작은 물방울이 하천을 이루고 흙덩이가 태산을 이루듯이 이 나라에 꽃다운 기풍을 일으키고, 또 다른 나라에 의로운 메아리를 보내어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면 그 두터운 정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매천집』 간행에 가장 어려운 점은 출간 인가와 자금 확보 두 가지였다. 그 중 출간 인가 문제는 중국 회남에 망명 중인 매천의 친구 김택영이 출간을 맡아주기로 하여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매천도 마지막 유언에서 김택영이 본인 시문의 정리를 맡아주기를 원하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자금난이었다. 『매천집』 출간 주역들은 이 문제를 뜻있는 선비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기 위해 ‘선비들이여, 부디 수전노가 되지 말고 은혜를 베풀어 도와주소서.’라는 통문을 전국 각지로 발송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매천집』발간 주역자는 5명으로 확정되었다. 매천의 동생 황원은 가족 측의 대표로 참여하였고, 매천의 제자들인 왕수환·권봉수·박창현 3인은 각지 선비들에게 통문을 발송하고 모연금을 모으는 일을 맡았다. 중국에 망명 중이던 매천의 벗 김택영은 문집에 실을 매천의 글을 선정하는 일과 출판을 담당하였다. 이들 5인의 주역들은 한반도 남녘의 구례와 중국 회남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일을 추진하였다.

『매천집』 간행을 위한 모금을 시작하다

왕수환·박창현·권봉수 3인은 공동 명의로 도움을 줄 만한 각지의 선비들에게 개별적으로 모연문(募捐文)을 보냈다. 서울의 김사원, 충북 보은 회인의 박문호, 경남 함양의 박문재와 하동의 오한서, 전북 남원의 손여경, 전주의 송기면과 오영석, 김제의 이규흥(이정직의 아들), 만경의 이락조(이기의 아들), 전남 광양의 송하섭 등에게 『매천집』 간행을 위한 모금에 협조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모금이 기대만큼 되지 않은 지역은 직접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박창현은 전북 남원의 박해창을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였다. 1911년 음력 12월 10일, 박해창은 왕수환·박창현·권봉수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