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도 안 벗기고 날로 먹으려 드는 세상
털도 안 벗기고 날로 먹으려 드는 세상
  • 백건
  • 승인 2006.11.29 21:56
  • 호수 1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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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귀에 있는 주막으로 술 심부름을 보내면서, 돈도 안주고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려서 보낸다.
 
 처음으로 하는 심부름엔 설렘도 가득했지만 몇 번 다녀온 형들은 안 가려고 슬슬 꽁무니를 뺀다.
 
주막 주인아저씨가 커다란 술 독 문을 여는 순간 확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 그리고선 대충 가져간 주전자에 술을 채워 보낸다. 무슨 맛일까?
 
오는 길에 아무도 안보는 골목에서 주둥이에 대고 한 모금 들이키다 이내 토해낸다.

이런 시금털털하면서도 쓴 술을 어른들은 뭐가 그리 좋다고 마실까 생각하며 어른이 되면 의례히 다 잘 마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난 아직 술맛을 모른다. 많이 마셔보면 맛을 알겠지만 아직까지 술 먹고 얌전한 사람을 한사람도 못 봐서 그런지, 여전히 내 입에는 그저 쓰디 쓴 물이란 생각 밖에 없다. 아니 때론 이 술이 원수(怨讐)란 생각도 자주 든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이 술 때문에 돈 버는 사람도 있고, 망하는 사람도 있고, 인생이 고달픈 사람도 있는가 하면, 또 즐거운 사람도 있는 듯하다.

술은 자고로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고 들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과 벗하고 지내기에 고상한척 주도(酒道)라고도 한다.
 
그렇게 어른에게 배워야 마실 때와 안 마실 때, 기타 술버릇이 바로 잡힐 수 있어서라고 한다. 그런 어른 옆에 있으면 자연적으로 몸에 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여기저기서 술술 한다. 이 술 모르면 어지간한 배움도 다 허탕이라 한다. 오며가며 다들 이 술 이야기로 쌍심지들을 켠다. 그런데 어른들보다 아직 머리도 덜 큰 아이들에게 더 강요하는 술이다. 아직 이 술을 왜 마시는지, 맛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시우는 술이다. 논술(論述) 이야기다.

논술에서 말하는 사고력과 표현력과 세상을 보는 눈이 제대로 있어야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런데 이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되는 일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날로 먹으려고도 하고 먹이려고도 한다.
 
이것은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야 맘에 안 들면 칼 대고 째고 꿰매서 만들면 수정이 되겠지만 소프트웨어는 절대적인 시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될까 말까한 그런 일인게다.

문제는 논술을 풀어야 하는 학생보다 그것을 지도하거나, 출제하거나, 분별해야 하는 제대로 된 선생이 현장에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모두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 진 어른들이 지금 대부분의 교육 현장에 있다 보니 논술 문제를 낸다는 자체가 우습고, 그런 문제를 붙잡고 풀어 보겠다고 발악하는 아이들이 눈물겹다.
 
더더군다나 문제를 풀어 놓고서도 어떻게 사고력, 표현력, 세상을 보는 눈들에 대해 성적을 매길 수 있냐는 이야기다. 결국 모범 답안을 만들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답 식 논술을 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창의적이기 보다는 획일적이기 쉬운 정답 식 논술을 다시 출제해서 논술마저도 생각하는 교육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을 또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결국 출제위원들은 눈치보고 안 되는 문제 만드느라 머리가 복잡하고, 학원과 출판 사업가 들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돈돈하고, 학생들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짬뽕 술에 머리 아픈데 논술에 취해서 비척거리다 이리 저리 처박혀 허우적거리고, 학부모는 발만 동동이며 돈 싸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교사는 교사대로 자괴감에 빠져 있는 현실이다. 술을 안마시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나름으로도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길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도 피치 못하게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때론 비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런 것을 비교하고 점수를 따지게 되면 비교와 우위를 점거하려고 박이 터지고, 결국 측량할 수 없는 학생들의 감성과 사고력을 계량화하고, 중요한 것은 뒷전으로 밀리고, 배우지 말아야 할 얄팍한 술수와 불필요한 것들을 암기하는 편법의 귀재들을 양성하면서, 결국 인격형성은 안중에도 없이 멀어지고 또 다른 획일화된 사고에 아이들을 찌들게 만들 것이다.

강남 아이들이 섬진강 변으로 전학 온 것이 뉴스가 되는 세상, 수 일을 자식처럼 키운 귀한 닭들을 바이러스 때문에 털도 안 뽑고 묻어야 할 농심(農心) 앞에서 호들갑 떨며 날로 먹으려 하지 말고 제발 늦더라도 차근차근 가면 좋겠다.
 
먹는 술도 잘 익혀야 제 맛을 낸다고 하니, 토해내는 논술(論述)도 잘 익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 눈앞의 영리를 위해 수년을 이루어야 할 기초를 부실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