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최평규 박사의 대북식량차관 전달 리포트(2)
[특별기고]최평규 박사의 대북식량차관 전달 리포트(2)
  • 광양신문
  • 승인 2006.10.09 15:27
  • 호수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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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에서 하역 관련 서류에 서명토록 배려
15시에 입항 수속이 종료되고 북측당국의 위임장을 소지한 북측인수단 대표 2명이 승선, 남측대표단과 상호 인사를 나눴다. 밝은 분위기에서 간단히 인도-인수 절차가 이루어졌다. 상례상 하역이 끝나고 선하증권, 상업송장, 포장명세서, 원산지증명서 등 기타 서류상에 서명하는 게 원칙이지만, 쾌히 선상에서 하역 관련 서류에 서명토록 배려해 우리 대표단 부담이 한결 가벼워졌다.

모든 절차를 마친 후 곧바로 하선하여 북측대표단은 우리 대표단 일행을 벤츠 2대로 안내하여 숙소로 향했다.

2시간 전에 입항한 선 이스트호는 본선으로부터 300m 떨어진 건너편의 야적장에 쌀포대를 하역하고 있었다. 실제 16시 30분부터 시작된 본선 하역은 육상크레인 4대로 본선에서 육상 창고 지붕을 통하여 창고 안으로 쌀포대들을 옮겼다. 흥남부두 창고는 천정부분이 개폐되도록 되어 있어 본선의 쌀 포대를 부두에 내리거나 다른 수송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하역 속도가 빠르게 진행됐다.

흥남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폭이 4차선 정도의 비교적 넓은 도로는 수십년된 굵은 버드나무 가로수를 경계로 2차선은 시멘트포장 도로, 바같쪽은 흙길로서 사람과 자전거가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흥남항을 어느 정도 벗어나자 버드나무 대신 코스모스꽃이 끝없이 이어져 마음은 벌써 가을을 달려가고 있었다.

이곳은 공업도시라 철길을 여러 군데 지나야만 했고 도로는 고르지 못했다. 도로변에는 가끔 아파트지역도 있었는데 페인트칠을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또한 일률적인 구조의 베란다에 놓여진 화분과 꽃도 자로 잰듯하여 전시용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 너머로는 기와지붕의 단독주택들이 많이 보였다. 마을 안쪽 길은 가볼 수가 없었다. 산에는 나무 한 구루 없이 잡초만 무성했다. 

흥남시는 인구 150만의 함남시에 속해 있었으나, 2년 전에 흥남시(인구 70만)가 함남시(인구 80만)와 분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택 수에 비해 일단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고 매우 조용한 거리였다. 간혹 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누추한 옷을 입은 사람과 일부 화장을 하고 밝은 색의 옷을 입은 여성이 보이기도 했다.

길가에서 모래성 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이고 도로변에는 흥남비료공업연구소, 김일성주석의 연구실, 공장 등 큰 건물이 보였다. 드문드문 식료품 상점, 공업품 상점, 음식점 등 간판이 보이기도 했으나 영업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가끔 비닐 옷을 걸친 길가상점에는 음료수와 과일 몇 가지가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흥남시는 공업도시로서 흥남비료공장과 제철공장, 흥남바닐론공장과 섬유공장 등 기계공업 및 섬유공업이 유명하다고 한다.

흥남항에서 출발한지 20분 후인 16시경에 도착한 숙소 ‘마전관광휴양소’는 숲과 해변사이 2만여평에 건설된 2층 빌라 30여동과 바닷가 해수욕장이 포함된 고급시설이 갖추어진 휴양소였다. 현재 UNICEF(유엔아동기구), WFP(세계식량계획) 등 UN산하기관과 HI(국제장애인기구) 등 유럽에서 온 국제단체가 사무실 겸 직원 숙소로 일부 사용되고 있었다. 입구 큰 건물에는 숙박인 접수처, 레스트랑, 바, 노래방, 상점, 서적-그림 판매점 등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입력 : 2005년 10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