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마을이 도심으로 탈바꿈하다
전통 마을이 도심으로 탈바꿈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2.08.0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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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읍 산저 교촌 내우 월파 신기 호북 성북 서북 마을

전통 누각 풍화루. 향교 출입문인데 보운사 정문을 옮겼다.
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 박두규 자유기고가

백운산에서 봉강면과 옥룡면을 가르는 작은 산줄기가 내려와 머문 내우산은 동쪽 마로산, 서쪽 서산과 삼각을 이루며 성읍의 터가 되고 광양만을 품는다.

소 모양의 내우산 아래로 고속도로가 지나며 마을을 갈라놓기도 했지만, 광양읍의 전통을 간직하고 새롭게 도심을 형성해 가는 곳. 월파에 금을 캐던 굴이나 칠성아파트 입구 옥금뜰에서 사금을 채취하던 일은 역사에 묻히고 대장간이 있는 마을에 공동주택들이 치솟으며 서천변에서 시민들이 어울린다.

내우산과 서천 사이 마을의 도시화

산저는 우산 아래 위치하여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 ‘내산저 외비촌(內山底 外飛村)이란 말이 전해진다. 빙고등 뒤의 문예회관과 도서관이 우산공원으로 이어진다. 내우는 마을 뒷산이 소의 몸에 해당된다.

교촌은 향교가 있는 마을인데 교육청이 자리하고, 소 여물통인 구유 모양이라는 조산에 봉양사가 있으며 덕석기를 앞세운 농악을 했다. 월파는 조선시대 학자 서신구의 호를 마을 이름 삼았고, 해비타트에서 사랑의 집짓기를 하여 20세대가 입주했다.

신기는 마을 뒷산이 거북이처럼 생겨서 구산(龜山)인데 뒷날 ‘새 터’라 했으며, 서천교 건너 체육시설이 ‘새 터’ 구실을 이어가고 김선준 죽필 전시관도 있다. 쇠머리처럼 생긴 산 아래는 우두 마을이고, 보운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은 보운 마을이다.

호북은 읍성의 북쪽 호랑이가 나타난 곳인데, 조선 중종 때 읍성이 허하다고 칠성 당산나무에서 서울대 학술림까지 7개 동산에 숲을 조성한 것이 북두칠성 같아서 칠성리다.

성북은 읍성의 북쪽 지역으로 남부학술림이 있고, 토지 구획정리 사업을 하면서 ‘홀아비 정자나무’를 광양교회 앞 공원으로 옮겼다. 서북은 남당 마을이 읍성의 서북쪽에 있어서 붙여졌고 서문 밖으로 있는 서평뜰은 개머리보에 물이 넉넉하여 옥토를 이뤘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내우 강대유(69) 씨는 스물여섯에 마을에 들어왔고 삼부토건에 입사하여 ’72년 남해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마을을 두 동강 내는 아픔을 겪었다. 월파 서효운(54) 씨는 ’96년 귀향하여 마을 청년회장을 맡았고 아내와 다육식물을 재배하며 실내건축을 한다.

호북 이경남(72) 씨는 ’97년에 귀향했고, 우리 음식연구회원으로 매실 가공과 푸른 잎으로 장아찌 만드는 솜씨가 좋다. 6.25 때에 재실로 피난 가며 냇물 건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성북 김재숙(66) 씨는 ’70년 혼인하여 도정업 하는 집안일 돌보며, 시어머니의 대를 이어 한국부인회에 참여해 여성단체협의회장까지 봉사했다. 11년 창단한 여성합창단 단장이다.

성북 강형철(95) 씨는 결혼 전 광양 광산을 다녔고, 여순사건 때 해룡 임씨 집으로 숙청 나간 경험을 안고 있으며, 세 끼 잘 먹고 걷기를 즐기며 광양 숲에서 사람들과 어울린다.

서북 박학채(74) 씨는 15세 무렵부터 장터의 대장간에서 7년 간 일을 배우고 순천과 보성의 대장간을 거쳐 ’76년부터 자신의 대장간을 열어 지금까지 농기구를 만든다.

서북 김순기(77) 씨는 칠성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할 때 홀아비 당산나무를 살리도록 했고, 남부학술림을 공원으로 하겠다는 시장의 공약이 이뤄지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