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박두규 자유기고가
[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박두규 자유기고가
  • 광양뉴스
  • 승인 2012.10.15 09:30
  • 호수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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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정·황현이 쓴 '거연정가'가 중앙에 걸렸다.


봉의 정기가 선비정신 이어준다(봉강면 상봉 당저 하봉 정자 석평 저곡 부현 마을)
호남정맥은 여수지맥으로 흘러가며 광양의 서쪽 경계를 이룬다. 여수지맥에서 튀어 나온 문성산과 비봉산의 동편, 상봉 마을로 가는 길에서 보면 문성산은 일(一)자를 이루어 일자봉이고 그 뒤로 비봉산이 웅크리고 있다.

백운저수지가 예전 봉강의 심장을 마비시킨 셈이지만 호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조선시대는 내우산 안쪽이어서 며내면이라 했으며 유학자 최산두가 태어난 곳. 학습하는 정자, 문중 재실, 효행 사적비 등이 많은 것은 선비정신의 전통이리라.

호수를 둘러싼 마을의 전통
상봉은 비봉산 기슭의 위쪽이며 면 소재지다. 쇳등은 철광산이었고 금도 났으며, 거연정은 1898년 박희권이 건립한 냇가에 복원됐다.

봉계는 비봉산 밑 내가 흐르는 곳이며, 육군 부대가 있다. 당저는 당밑인데 비봉산 아래라는 뜻과 더불어 서당 아래 또는 할미당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후학을 가르친 옥천정사(이돈모 건립)와 송간정(이준모 건립)이 있고 효행 효열비가 6기 있다. 하봉은 비봉산 아래 남쪽에 있다는 이름이고 백운저수지 안쪽이다. 정자는 시냇가를 따라 정자나무가 무성하여 이름으로 삼았는데 작은 마을이 도로로 나뉘어졌다.

석평은 마을 중심에 거대한 암석을 ‘돌무뎅이’라 부른 것이다. 저곡은 달실, 닥골이 변한 이름이다. 달실은 마을 북쪽이 반달형이어서 월곡이며, 닥실은 산골짜기란 의미와 함께 닥나무가 많이 났다고 전해지며 저곡이다. 큰 인물 최산두의 고향으로 묘와 신도비가 있으며, 장수천 우물이 좋아 10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부현은 마을이 가마솥 모양이라는 것과 옥룡 넘어가는 큰 고개인 가막재가 이름이 됐다는 설이 있다.

가슴앓이를 하며 희망 일구기
상봉 송기장(70) 씨는 부산으로 가서 사업을 하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02년 귀향하여 황토방을 짓고 청국장을 먹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그 때부터 청국장을 제조해 판매하며 가시오가피 같은 약재를 생산한다. 당저 허용옥(64) 씨는 백운지 조성으로 마을의 일부가 수몰되고 피해를 봤는데 테마공원이 추진되고 택지로 인기가 있는 마을을 실감한다.
농사도 전문 직종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다래 하나에 매달렸는데 행정의 지원이 없어 아쉬웠다.

하봉 허만표(78) 씨는 여순사건 때 전봇대 밑에서 보초 서며 욕을 봐서 6.25는 보드랍게 보냈다고 한다.

박인기(69) 씨는 태생지인 조양 마을이 백운지에 수몰되었지만 앞 냇가와 뒤 소나무를 잊지 못하고 저수지 옆에 깃들었다. 교사를 할 때는 ‘일의 재미’라는 단원을 이해 못했으나 지금은 정말 일의 재미를 느끼고 운동으로 여긴다.

정자 이상영(63) 씨는 옥룡 밤실에서 났으나 어머님의 성화로 외갓집을 매입하여 들어왔다. 82년 보리를 수확하여 430가마를 마을에 쌓아놓고 수매를 하도록 한 일과 99년 독립 마을이 되도록 힘썼다.

석평 박광기(51) 씨는 연경당이라는 전통한옥 민박을 운영하면서 구들에 불 때기와 농원에 전시된 매실 150종을 체험하게 한다.

저곡 채정규(85) 씨는 일제강점기 열일곱 살에 경찰주재소에서 방위대원을 지명하자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2년 뒤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해방 후 귀국길의 혼선을 경험했고, 여순사건과 6.25라는 험악한 세상을 넘기며 1960년 면 의원을 역임한 지방자치의 증인이다. 백운지 때문에 봉강에 태풍 피해가 심하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