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위, 다압면 조쌍보씨 항일독립운동 규명나서
과거사위, 다압면 조쌍보씨 항일독립운동 규명나서
  • 귀여운짱구
  • 승인 2007.03.15 10:03
  • 호수 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씨아들 공출거부운동 등 사실규명 요구 받아들여
 
다압주민들 “일본 경찰에 끌려간 것은 사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가 일제강점기 말인 지난 1945년 4월28일 다압면 섬진강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조쌍보(1898-1945)에 대해 항일독립운동 규명에 나섰다.
14일 과거사위 민족독립조사국 관계자에 따르면 조쌍보씨는 다압면 고사리 죽천마을 출신으로 1942년께부터 국내에 숨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은밀히 제공하거나 은신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일본군에게 공출을 거부키 위해 곡물을 땅밑에 숨기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끌려가던 중 섬진강변에서 저항하다가 다압면 신기부락 앞 섬진강변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취지다. 조씨의 이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다름 아닌 최근 조씨의 장남인 조정수 (68.삼천포시 거주)가 지난해 삼천포시청을 통해 과거사위로 접수되면서 이를 접수 받은 기관이 본격적인 사실 규명에 나서면서 수면위로 나타나게 됐다.

이에 과거사위는 최근 광양신문에 이에 대한 사전 조사차원의 관련정보 등을 요청해와 기자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지난 7일부터 3일간 다압면 죽천마을과 신기마을, 섬진마을을 찾아 현재 그곳에 거주하는 최고령자들을 대상으로 확인 작업에 임했다.
본지는 먼저 조씨의 호적과 제적을 다압면사무소에 협조를 얻어 열람해 본 결과 조씨의 제적에는 ‘1945년 3월 28일 오후 9시30분 다압면 신원리 신기마을 앞 섬진강변에서 사망’이라고 명기돼 있었다.
 
 
오랜 사건으로 목격한 생존자 없어 ‘난항’예상
 
기자는 먼저 조씨가 살았던 죽천마을 경로당을 찾았다. 그곳에는 할머니 다섯분이 있었는데 그 중 최고령자인 양예복(84)할머니는 “어렸을적 일본 경찰에 끌려가 죽었다”는 말만 들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마을 노인회장인 이강성(79) 할아버지는 그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전해줬다. 이강성 할아버지는 그를 묻는 기자에게 “조쌍보는 신원리 신기부락 앞에서 죽은게 아니고 도사리 섬진마을 앞 섬진강변 주막집에서 일경을 피해 도망치다가 섬진강으로 뛰어들어 그만 익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조쌍보는 원래 수영에 능해 누워서 코만 물 위로 보이게 하고 섬진강을 건너는 등 수영이 탁월했어. 그런데 그날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두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끌려가던 중 섬진마을에 이르렀을때 일본경찰이 자신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이 마을 주막집에 들러서 일어난거지. 조씨는 일경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그틈을 이용, 주막 옆문을 뛰쳐나와 탈출을 시도해 결국 쫓기다가 섬진강으로 뛰어들었지. 그렇게 수영을 잘하던 그가 손에 묶인 포승줄 때문에 수영을 하지못해 익사했는데 그 시체가 신원리에서 발견된 것뿐”이라고 상세하게 전했다.

그러나 이같은 내용은 그 또한 어렸을때 어른들에게 전해들은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조쌍보가 마을사람들에게 한 행적이다. 이강성 할아버지는 1945년 당시 16세로 조쌍보에 대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조쌍보는 일찍이 일본을 다녀와 일본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일본인들이 관리하던 마을 산을 지키는 산감을 지낼 정도로 다압주재 경찰과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일본 주재 경찰과 유일하게 대화가 되는 사람이 그이기에 주민들이 강제징용 등을 피해 쫓겨와 숨어 드는 곳이 조씨집이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씨는 이러한 마을 사람들을 경찰과 친분으로 모두 내 일같이 처리해 주는 마을의 고마운 사람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씨가 숨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밥과 잠자리, 공출거부를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자는 이강성 할아버지의 주장을 근거로 과연 조씨가 섬진마을 주막에서 일본 경찰에 쫓겨 섬진강으로 뛰어들었는지에 대한 사실확인을 위해 섬진마을을 찾았다. 이마을 박경조(79)할아버지는 “마을 앞 당산나무 앞에 주막집이 자리해 많은 사람들이 애환을 달랬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전하며 “조쌍보는 우리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지만 워낙 유명해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며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으나 우리마을에서 그런 일이 있는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마을 박석귀(72)씨 또한 큼지막한 방 3칸과 부엌 마루가 딸린 당시 주막집은 마을 당산나무와 섬진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로 추억이 많은 곳인데 조쌍보 어르신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한편 진실ㆍ화해위원회는 15일 광양을 찾아 본지와 함께 관련 증언자들을 찾아 기록을 하는 등 진상규명 활동을 벌인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잘못 끼워진 역사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 후대에게 희망 있는 미래를 열어줘야 한다”며 “아직 검증을 거치지 않았지만 철저한 진상규명과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