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와우마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와우마을’
  • 정아람
  • 승인 2013.07.01 09:17
  • 호수 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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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대로 이병노·이병화ㆍ 길만석ㆍ 이병곤·황인석 어르신

와우, 유년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가야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리뻗은 산등성이의 맨 끝부분 남쪽바다와 맞닿은 마을이다.

와우 달동네를 올라가는 언덕 입구에서부터 시작해 중턱에 이르기까지 블록이 쌓이듯 세워지던 오두막들과, 경사가 완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심어놓았던 봉숭아 그리고 꽃들. 여름이면 손끝에 붉은 물을 들이려 돌멩이로 찧고 얼어붙은 논 위에서 지치도록 탔던 썰매.

성냥개비로 아버지 속옷을 태워먹기 일쑤였던 불장난 그리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던 익숙한 시골 풍경들.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흑백의 추억들이다.  와우는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을 떠오르게 해 줄 단 하나의 흔적도 가질 수 없다. 와우는 지금 사라져가고 있다.

와우 달동네에 올라 동네를 바라본다. 논농사, 밭농사를 생업 삼아 순박하게 살아온 이웃동네. 나무 그늘아래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듣는다. 5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와우. 몇 십 년 전만해도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갯벌에서 바지락이며 굴을 땄다. 그물을 여미는 어부들과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다. 이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와우 마을

“태인동 김 씨만 김만든거 아녀”우스갯 소리로 던진 이병곤 어르신(76)의 한 마디다.
그렇다. 와우는 김맛도 뛰어났다. 폐허로 남겨진 건물 한편에는 ‘맛과 영양이 듬뿍! 광양김!’이라는 글귀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먹고 사는데는 이만한 곳도 없었다.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대학까지 보냈다. 한 밑천 마련해주지는 못했지만 시집 장가도 보냈다. 손주들의 재롱에 일이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어본지가 언젠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제 정든 고향을 떠나야한다.

배가 오가던 포구는 이제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원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5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던 와우는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병노 어르신(80)은 “한평생 살 집도 지진에도 끄떡없도록 튼튼하게 지었는데 떠나야 하니 아쉽고 슬프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루의 노고를 풀던 작은 막걸리 집과 허름한 가옥들, 작은 좌판가게, 이제는 다 사라졌다.

길만석 어르신(74)은 “잠을 잘 수가 없어 도통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라며 “특히 경로당을 떠나지 못하지”라고 말했다. 현재 경로당은 명의가 시 앞으로 있어 보상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황인석 어르신(78)은 “비록 보조를 받고 지었지만 보상을 받을 때까지 경로당만큼은 허물지 못하게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 보금자리 빼앗아 누구의 보금자리를 주려는가, 말과 함께 도시화 되어가는 우리의 삶. 어느덧 와우에는 20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워도 찾아갈 고향이 없는 그들의 심정은 오죽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