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8. 태인동 ①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8. 태인동 ①
  • 광양뉴스
  • 승인 2013.10.28 09:40
  • 호수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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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김 양식, 장관ㆍ국회의원 인물 다수 배출

태인동에 있는 김 시식지 유래비


지형과 위치

태인동(太仁洞)의 지명이 처음표기된 것은 고려사(1451년)에 광양현 대안도(大安島)라 표기돼 있으며 광양에서 가장 큰 섬으로 원래의 지형은 유지하고 있으나 태인교 주위의 애기섬이 사라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북단에 있는 배알도(蛇島)를 기점으로 서남방향으로 형성된 섬이고 동쪽에는 섬진강 보류가 남해로 흘러가고 있다. 금호도와 나란히 쌍둥이 같은 형국이며 북쪽은 배알도에서 나누어진 지류가 서쪽으로 흐르며 중간에 다시 샛강을 만들어 금호도와 사이를 띄워버렸다. 섬의 중심에 있는 삼봉산(222.1m)을 기점으로 낙지발처럼 여섯 개의 능선자락에 5개 마을로 형성돼 있다.

배알도 남쪽지역은 퇴적된 모래벌판으로 예전에는 해수욕장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기점인 섬의 명칭은 당초 사도(蛇島, 뱀섬)였으나 풍수지리 학적으로 북쪽에 있는 왕궁을 향하여 배알(拜謁, 엎드려 절하는 모습)하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섬은 전체적으로 감자와 비슷한 모형이며 남쪽으로 가면서 낮은 지형이 형성돼 갯벌이 넓게 조성돼 있었다. 남쪽부분의 갯벌은 그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워진 것은 광양제철소 공장부지로 일부가 매립되었기 때문이다.

옛적에는 산이 낮고 자체적으로 생성된 담수가 없어 수리가 불완전해 주곡의 생산이 자급자족되지 못했다. 민물이 없으니 빗물에 의해 농사를 지었으며 논농사 보다 밭농사로 경작을 했던 지역이다. 인구는 많고 농토는 적으니 부족한 식량은 육지인 옥곡ㆍ진상ㆍ진월ㆍ하동 등지서 조달해 살았던 곳이다. 동쪽에는 경상도 하동군 금남면이 있으나 섬진강이 흐르기 때문에 내왕은 별로 없었다.


역사적 발전

삶을 풍요롭게 해준 해태의 생산은 1640년 김여익(靈岩 人)이 김(海苔)을 발견하고 육성해 생활에 편익을 도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특히 도서지역의 역사는 교통 불편과 왜구의 잦은 출몰로 문화생활을 형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고장의 명칭이 혼란스러운 것은 조선조 때 발간된 역사의 진본에 의한 것으로 변화가 많았다. 왜냐하면 혹자는 원래 대인도(大仁島)인데, 일제 때 이곳에 큰 인물이 많이 날것을 염려해 일본인들이 간사하게 점을 찍어 태인도(太仁島)로 했다는 세론이 있으나, 태인도(太仁島)라는 명칭은 해동여지도1776~1787년)에 수록돼 있으니 일제와는 관련이 희박해 보인다.

태인동의 지명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문종 원년에 발간된 고려사(1451년)에 광양현 대안도(大安島)라 기록하고 있으나 곧이어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해조도편에 태안도(泰安島)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시 대안도(大安島)라 적고 있다. 그리고 태인도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해동지도이며 1861년도에 쓰인 명예궁 세수록에도 태인도(太仁島)라 표기한 것을 보면 이곳은 대안도(大安島)⇒ 태안도(泰安島)⇒ 인호도(仁湖島)⇒태인도(太仁島)라는 명칭으로 변경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인호도(仁湖島)라 부른 적이 있으나 섬이지만 내륙의 형태로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니 아름다운 호수로 보아 인근 금도를 금호도(金湖島)라 했고, 길도를 길호도(吉湖島)라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899년에 편찬된 돌산군지에 삼봉산을 대인산(大仁山)으로 표기했음은 지명을 따라 표기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광양군 태인도 외 8개 섬이 돌산군 북면에 편입돼 있었던 시기라 작성자의 편의에 의한 조치라고 보인다.

관할의 변경은 호구총수(1789년)에 광양현이 12면 147개 마을을 관할 할대 이 지역은 금호도와 함께 옥곡면 관할이었고, 하동곳지촌(河東곳之村)과 장내촌이 있었다. 그 후 전국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1895년)를 도입하면서 광양현을 광양군으로 개칭할 때 태인동은 남원부 관할 광양군 골약면 지역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1896년 여수와 합해 있던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광양군 일부 도서가 돌산군 북면으로 되었다가 3년 후에 명칭이 태인면으로 개칭되고 1914년에 행정개편(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돌산군이 해체되었다. 이때 광양군으로 환원되면서 묘도(猫島)부속인 우순도(牛脣島)ㆍ지진도(智進島) 등은 여수에 편입되고 말았으니 불과 99년 전의 일이며, 환원된 지역은 골약면에 속하게 된다.

그 후 여순반란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재산상 손해와 인적 손실이 발생함에 따라 인구이동이 있어 주민의 생활편의를 위해 1966년 6월 1일 태인출장소를 설치하면서 금호도를 포함해 면단위의 업무전반을 취급했던 것이다. 23년 후에 광양지구 출장소가 동광양시로 승격되면서 태인동으로 확정되었고, 1995년 1월 1일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통합되어 광양시가 탄생된 후 태인동의 명칭으로 이어지고 있다.


살기 좋은 곳

태인도는 섬진강 하구로서 북쪽은 평야나 늪지대가 아니고 바로 절벽과 같은 강변 형이어서 농경지가 협소한 지역이다. 강변을 이어 둑을 쌓아 농경지를 조성했으나 저수지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논농사를 지을 수 없어 쌀은 아주 귀했던 것이다.

밭을 이용한 농산물로는 보리ㆍ밀ㆍ콩ㆍ고구마 등이었으며 부족한 식량은 인근 육지에서 조달했었다. 그러나 해산물과 조개가 다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공급은 원활한 편이었다,

태인도의 지형은 남서쪽으로 갯벌이 평원처럼 넓게 형성돼 있는 지역이며 그 갯벌에는 맛이 특출한 조개(대합ㆍ우럭ㆍ맛ㆍ바지락)는 물론 어물인 농어ㆍ전어ㆍ낙지ㆍ쭈구미 등 여러 종류의 수산물이 생산돼 생명부지는 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1640년 김을 생산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어 태인도에는 ‘개도 지전을 물고 다닌다’는 농담이 생겨날 정도였다. 김을 생산하는 방법을 개량하고 제조와 판매에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가 활성화됨으로써 교육의 여력이 생겨 인근 육지는 물론 여수ㆍ부산서울까지 자식 유학을 보내게 됐다.

섬이지만 명당이 있고 그 지력이 유지됨으로서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고장이다. 장관ㆍ국회의원ㆍ행정부 차관, 기타 고급공무원과 석ㆍ박사는 물론 재력을 가진 명사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근래에는 간척지와 모래땅이 짠(鹽氣)기운이 다 빠지고 지하수를 이용할 수 있으니 쌀을 생산할 수 있고 근면과 성실로 농사를 짓고 있으니 생산량이 배가돼 식량자금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출타한 향우들이 고향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83년부터 시작한 광양제철소가 건립되면서 일부의 땅이 매립되었으나 공장의 준공으로 인해 소득원인 직장이 생겨 고정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문화수준이 육지를 능가하고 있다.

옛날에는 북쪽에 있는 나루를 이용해 진월면을 경유 육지로 갈수 있었고 망덕에서 연락선을 이용해 부산으로 갈 수 있었다. 여수는 직접 배를 이용해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금호도를 경유해 육지로 가기위해서는 도촌에서 나루를 건너 내왕했다.

또한 생필품 구입과 어류, 패류의 판로는 옥곡·진상 장을 이용할 때 배로 직접 운반했다. 교통이 편리한 것은 태인대교가 북쪽으로 개설돼 진월인터체인지를 이용해 부산·서울방면으로 왕래할 수 있고 동쪽으로는 섬진대교가 하동군 금남면으로 연결돼 있고, 서남쪽으로 개설된 태인교를 이용하면 시청과 광양읍을 다닐 수 있으며 이순신대교를 이용하면 여수는 10분대로 갈수 있는 편의성이 보장돼 있으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문화유산

태인도에는 고대의 유물이나 유적은 희귀한 편이다. 원인은 정치나 종교적인 영향을 적게 받았고 경작지가 좁으니 농경문화에 관해 크게 발전하지 못한 탓으로 사료된다. 다만 용지마을에 고려이전 것으로 추정되는 패총(조개 무지)이 있으나 규모가 크지 않고 비탈진 곳에 있으며 발견된 유물은 농기구나 자기류는 없고 단순한 조개무지일 뿐이다.

근래에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제113호 인 광양 김 시식 지(光陽 金 試食址)가 있으며 관광지로 지정돼 매일 관광객이 방문하면 김 시식에 관한 모든 것을 해설하기 위해 문화해설사가 대기하고 있다. 보전되고 있는 문헌 중에는 해태거래장, 대인초등학교 육성회비영수증, 예방접종확인증 등 20여종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