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8. 태인동 ②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8. 태인동 ②
  • 광양뉴스
  • 승인 2013.11.04 10:14
  • 호수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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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 전설 ‘궁기마을’ 350년 전통 ‘용지 큰줄다리기’

태인동 전경

역사 깊은 명소들

태인도는 5개 마을로 조성돼 있으니 발품으로 다 돌아볼 작정이다. △첫 방문지는 도촌마을로 이곳은 도선장(渡船場)으로 교통의 시발점이었다. 마을의 형성은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그릇조각(고토기ㆍ고려청자조각)으로 보아 고려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보아지나 기록상으로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부터라고 보고 있다.

금호도와 내왕하는 나루가 있어 도촌(渡村)으로 불러졌으며 여수에 속해 있는 묘도와 골약면 해안지대 주민들이 배를 이용해 하동으로 드나들던 물목에 해당된 곳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수군선봉부대가 주둔하였다고 전하는 군두리(軍頭里)가 있으며 태인초등학교가 있다.

명세궁수세절목(1861년)에 의하면 도촌(道村)지역은 선박으로 남방해안을 출입하던 물목으로 보았다. 도촌 원주민은 경주 최씨(전서공파)로써 신라 때 사람인 최치원의 후손들이다. 태인동은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전인 1981년경에는 인구 3,329명이 김 양식을 비롯해 각종어패류 채취로 연간 약 50억 이상의 소득을 얻었던 곳이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되면서 작은섬(돌섬ㆍ북섬ㆍ지신도ㆍ서취도) 등은 제철 부지로 폭파 또는 매립되어 사라지고 없다. 주요시설물은 태인초등학교(1943년 4월1일)ㆍ태인 연륙교가 있으며 유물 산포지역은 중앙교회 부근 구릉지에 연질ㆍ경질 토기 편은 원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나 도요지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한때는 도의촌(道義村)으로 불러지기도 했으나 이름을 두 글자로 개명하는 과정에서 도촌(道村)으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장내마을에 있는 태인동 주민센터



△장내마을은 특별한 유물과 유적지는 없으며 1600년경에는 섬전체가 광양현 동면 옥곡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호구총수(1789년)에 옥곡면 장내촌이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 이름이 등장한다.

마을의 이름이 전하는 바는 전우치(田禹治)가 쌓은 궁궐의 ‘담안’으로 이를 한자음으로 표기하니 장내(墻內)로 되었다고 하며 그 마을사람을 ‘담안댁’이라는 택호로 불렀다. 따라서 옛날 훈련도감 및 궁중에서 이곳을 관리하였을 때 각종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조정에서 관직을 부여받아 파견된 관리가 담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뒤에는 섬에서 가장 높은 삼봉산 남쪽에 위치해 있고 동쪽은 용지마을이며 서쪽은 도촌마을이다. 섬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공공기관으로 태인동사무소ㆍ경찰서 중마지구대 태인치안센타ㆍ종합복지관ㆍ우체국ㆍ농협 태금지점이 있다.

그리고 망월재(전주 이씨 재각)가 있다. 기록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 달성 서씨가 처음 입촌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후 전주 이씨가 입촌해 번성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씨는 양소공파로 이희(李熙, 중종 때 사람)가 골약면 군장으로 이주한 뒤 그의 현손 이상준이 장내에 살던 서씨 가문의 처자와 결혼한 뒤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태인중학교 부지 일원은 염전으로 1만여 평에 달하는 소금밭이었다. 마을 가운데 약 400년 된 은행나무의 고목이 있는데 이를 당산나무로 삼아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당산제를 지내왔으며 1987년 마을 앞 논 4천여 평을 매립하여 도시형 선미아파트가 들어섰고 그의 앞바다를 메워 제철연관단지가 조성되어 대단위 공업단지로 변모되어 옛 모습의 일부가 사라졌다.

△용지마을도 고려시대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 패총더미에서 유물이 수습된바 있으나 문헌에 기록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지명으로는 태인도 내에 속해 있다. 1861년 사료인 수세절목에 의하면 하동고지(河東古池)지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 지역은 옛날 하동고지 또는 하동곶지촌(河東串池村)이라 부른 유래는 하동을 향해 쑥 뻗어 나온 땅이란 뜻이다. 1912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돌산군 태인면 용지리(龍址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난다.

명당마을에 속한 배알도. 태인동 1번지다.

 


문화유산으로 용지 큰 줄다리기가 있으며 약 350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 행사로 초닷새부터 한집도 빠짐없이 참여해 시작하며 짚을 염출해 새끼를 꼬아 모아서 합쳐 꼰 줄로 용줄을 만들어 보름날 이것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양편으로 나누어 힘을 겨루는 민속놀이이다.

지명의 유래는 산세가 여자가 머리를 풀고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형국이라 마을 앞에 있던 아기섬을 중심으로 발전할 것이라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광양제철소 건설로 부지조성 때 아기섬ㆍ북섬ㆍ돌섬ㆍ지신도ㆍ서취도 등 모두 5개가 사라졌다.

마을 큰 줄다리기는 1640년 김여익이 입도(入島)해 김을 발견하고 김 양식 법을 개발한 후부터 시작했으니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 행사는 정월대보름에 거행되며 초닷새부터 모두가 참여할 때 짚을 가져와 ‘줄드리는 소리’와 함께 작업을 한다.

보름 전날까지 곁 줄 양쪽을 달아 작업을 마치면 길이가 4~50m 정도가 되고 지름은 1m정도이며 보름달이 떠오를 때 줄다리기 시합을 하며 농악으로 흥을 돋운다. 승패가 결정되면 마을로 돌아와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진다.

△궁기마을은 등 너머에 용지마을이 있으며 동쪽은 넓게 펼쳐진 명당들이 있으며 이곳에 전우치가 묻어둔 금 대들보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건너는 하동군이다. 궁기는 궁터(宮 땅)이란 뜻이고, 1840년도 간행『湖南島嶼圖』에 대안도(大安島)가 궁장(宮庄, 각 궁궐에서 관리하였던 논밭)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옥곡ㆍ태인도 지역의 해태 및 진포세(鎭浦稅)를 적은『明禮宮 收稅節目』에 태인도가 옛날 궁중에 속한 땅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이는 별궁에 속한 전답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에는 전우치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얼마 전 MBC 드라마로 방영돼 널리 알려졌으나 광양에서 전우치의 활동이 없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아쉽기만 했다.

그는 조선조 중종 때 실존인물로 미관말직을 역임했으나 물러나 송도에서 기인으로 변신된 걸인(傑人)이다. 전우치는 태인도(宮基)에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으며 말(馬)을 조련했던 터가 있었다고 하며 궁기마을은 그의 궁터이며 성지(城地: 성재)는 성터이다. 그는 태인도에 자리 잡고 인근 작은 섬을 유락장으로 활용했으며 남해안 일대를 지나가는 세공 선을 부채로 태인도 까지 유인하여 곡물을 탈취했다고 전한다. 또한 명나라에 가서 금으로 만든 대들보를 가져와 명당등에 묻어두었다니 구미가 당긴다. 그 외에 세세한 내력은 광양시지 1178페이지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제113호인 광양 김 시식 지(光陽 金 試食址)가 이 마을에 있으며 김에 관한 모든 것을 방문객들에게 해설해 드리고자 매일 문화해설사가 대기하고 있다. 또한 궁기패총이 있으며, 영모재(김해김씨 재실) 건립을 위해 경사면을 깎아내면서 패총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현재 일부가 보존되고 있고, 규모는 남북 약 20m, 동서 약 15m이고 노출된 단면이 1m 내외이다.

△명당마을은 태인동 1번지인 배알도와 접해 동북쪽에 있으며 섬진강 물살에 모래가 쌓인 넓은 들이 있고 남쪽은 바닷물이 들고나는 섬진강 하구지역이다. 이곳은 1959년 제방을 쌓기 전에는 띠밭 섬에 불과한 작은 섬이었다. 1964년을 전후해 제방 1ㆍ2호를 축조해 1백 정보에 달하는 간척지가 조성됨으로써 이곳으로 이주해오는 자가 생겨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사업이 있기 전에는 떨어져 있는 토박한 섬으로 취급되었던 곳이었으나 농토가 조성되자 시선을 받게 되면서 발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명당(明堂)이란 이름은 전우치 전설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가 명나라에서 가져온 황금대들보를 궁기앞바다에 감추어 두었는데, 이곳이 현재의 명당들로 금이 숨어있는 길지라하여 명당이라 불렀다고 전하지만 잔디가 많아 ‘짠디 밭등’ 또는 ‘대밭등’ 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여지도서(1760년)와 대동여지도(1861년)에는 사도(蛇島, 뱀섬)로 표기되어 불러왔는데, 망덕산에 ‘天子奉朝穴’혈이 있다고 전함에 따라 이곳을 바라보고 배알(拜謁)하는 형국이라 해서 불러져 왔다고 전하고 있다.

21세기를 접어들면서 주변을 정리하고 내 축을 쌓아 지금은 휴양지와 경기장으로 일부 사용하고 있다. 이후의 변화를 보면 2002년에 51가구 165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그중 일부는 명당 등 산업단지 조성으로 이주해갔다.

이곳에 특별한 유물이나 유적지는 없는 형편이며 해운정(海雲亭, 배알도 섬 정상에 1941년 진월면 안상선(安尙善)의 찬조금으로)을 건립했으나 1960년 초 사라호 태풍으로 붕괴되어 없어졌다.

3개의 다리(태인대교ㆍ태인교ㆍ섬진대교)가 설치돼 있고 추가되는 다리는 도촌(금호도촌⇔대인도촌)을 연결시키면 4개가 된다. 또한 이 다리를 이어 섬진강변을 따라 도로개통이 목전에 있으니 편의성을 더하게 된다. 이제 5개 마을을 답방했으니 자료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