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1>순간에서 영원을 보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1>순간에서 영원을 보다
  • 광양뉴스
  • 승인 2014.09.01 09:34
  • 호수 57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양을 찍는 사진작가 주성일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군 제대 후 제약회사 홍보팀에 근무하면서 부터였어요. 등산을 좋아하고, 호젓한 산사를 좋아하다 보니 사진과는 자연스레 더 가까워졌고요.”간단한 인사가 오간 뒤에 작가는 사진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커피 맛이 일품인 단골 카페였다. 한사코 취재에 응하길 꺼리던 작가.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만나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반짝였을 예술가의 눈빛을 만나야 한다는 욕심과, 작가 고유의 색깔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기대감이 설렘 반, 부담 반으로 다가왔다. 한 번의 만남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라지는 광양의 모습을 기록하다

작가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32년 전, 1979년 부터였다고 한다. 80년 초, 그가 고향으로 내려 올 무렵, 광양은 산업화의 첫 삽을 막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록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적기였다. 작가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토속적인 생활이 도시화되어가는 과정, 사라지는 골목길을 찍고 또 찍었다.

 “기록도 없이 사라져가는 부분을 내가 찍어서 남겨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있었어요. 향토사학자이자 누구보다 애향심이 깊었던 고 김재훤 선배님의 조언도 있었지요, 옛날에는 우리 광양이 절텃골이었다는 이야기도 해줬어요. 절터였다고 알려진 곳은 당연히 다 찾아다녔지요.

그러나 기록도 미미하고, 유물 유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어요. 송천사, 황룡사, 나안절 등 폐사지의 흔적은 축대나 기와 파편, 풀숲의 부도 몇 기 등으로 겨우 남아 있었어요.

그 때 당시 광양에는 자연 마을이 278개 정도가 있었어요. 4~5년 만에 싸이카 두 대가 없어졌지요.”무슨 말인가? 닳아버린 오토바이 두 대를 폐기처분 했다는 말이었다. 주말마다 광양 구석구석을 3년 동안 누비고 다녔다고 하였다.

 “마을의 전경을 다 담았고, 오래된 정자, 제각, 당산나무, 그 마을에서 특히 아끼는 것들을 빼놓지 않고 찍었어요. 마을의 세세한 정경은 개인 가옥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구판장에서 라면 끓여먹고, 이장 집에서 잠을 청하고 그런 나날이었어요.  그 때는 대부분 도로가 비포장이라, 산길마저 없는 곳도 많았어요. 밤나무길, 비탈진 길을 다니는 동안, 두 대의 오토바이가 그렇게 없어졌지요. 허허. 그뿐인가요, 타이어가 펑크라도 나면 <엥간한> 길은 걸어야 했어요. 사진은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찍어야 잘 나오는데, 역광이나 측광을 이용하면 사진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가 있거든요. 새벽이나 어둑어둑할 때 산을 오르내리니,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신고가 들어가기도 했어요.”

고(故) 이경모 선생과의 인연

 “『한국 격동의 기록』이라는 사진집이 있어요. 고 이경모 선생의 사진집인데요.” 

 이경모(李坰謨 1926-2001) 선생은 광양출신으로, 한국 기록사진의 대부로 불린다.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으로,‘8·15해방’‘여순 사건’을 취재하였고, 국방부 정훈국 문관으로‘6·25 전쟁’을 기록하였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도 사진가의 관점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참조: 동신대 김창환 논문) <잔설>, <유당공원>등은 회화적인 정취가 넘치는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생을 만나면서 사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다큐멘터리 사진과 회화 사진

다큐멘터리와 회화. 기록과 예술. 작가에겐 어떤 장르가 더 매력적일까? 갑자기 든 우문(愚問)에 작가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연출하여 포토스토리(photo story)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요. 시대별로 변해가는 지역의 모습을 앵글에 담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커다란 매력이 아닐까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재현해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매체야 말로 사진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회화사진은 대상을 실제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 비친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피사체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작업이지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의 연출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추구하고 싶은 영역 아니던가요?  옛 초남광산 앞에서 갯벌 고랑을 배경으로 석양을 찍은 작품이 있는데, 1981년 목포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을 했어요. 창작사진 예술만의 매력이 있지요.”

 사진은 컬러 보다는 흑백이 훨씬 깊이가 있고 감동을 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요즘은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고 즐기지요.”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라고 하였다. 이미지나 의미는 그 다음이라고 하였는데, 얼핏 고개가 갸웃거려졌으나, 구도가 좋지 않은 사진은 아무리 잘 찍어도 아마추어 사진이라는 뜻이리라.

“요즘은 포토샵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나는 쓰지 말라고 해요. 예술적 감각을 흐리는 것이거든.”

특별히 아끼는 작품이 있다면?

 “잘 나왔든, 못나왔든, 하나같이 다 소중하지요. 광양전국사진공모전 수상작 중 「탑돌이」 라는 작품이 있어요. 중흥사 3층 석탑을 두고 탑돌이 하는 모습을 찍었는데요.”

「탑돌이」는 색채와 선들의 움직임이 유려하고, 향토적인 감성에서 시작해 고행의 이미지를 회화예술의 차원으로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시간대별 재촬영을 거듭하면서 장타임을 이용한 야간촬영 기법으로 물 먹은 별이나 황혼의 부드러움을 잘 살려냈다는 기술적인 평도 있었다.

“고생을 많이 했어요. 다른 사진도 그렇지만, 고생한 만큼 표현도 그런대로 잘 되었어요. 당시 중흥산성 3층 석탑은 보존상태가 좋았어요. 조각된 상들이  뚜렷하고 탑신의 상단부도 양호 하였지요. 현재는 소실되어 문화재로서 구실을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작가의 이력

작가는 대외적 활동에도 열성을 바쳤다. 광양 사진협회 지부장을 역임했고, 사진협회 전남도지회를 창립하여 부지회장, 지회장을 두루 역임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전라남도사진대전 추천초대작가, 전남사진문화발전 기여로 전라남도지사 공로패 2회 수상, 한국예총 예술부분 공로상 수상(06년)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기다림의 미학이 만드는 예술
 
백운산은‘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라고 작가는 말하였다.‘애향산’이라는 작가만의 애칭도 있다한다. 도솔봉, 억불봉, 송락봉, 노랭이봉, 똬리봉 등의 아름다운 사계를 앵글에 담는 것은 즐거운 고행이었다.

“억불봉의 사계를 찍으려고 수십 차례나 산을 올랐어요. 어제 올랐던 그 산, 그 자리에 <똑 정신없는 것 맹키로> 가서, < 똑 그 자리, 똑 어제 포즈 그대로 쭈그리고 앙거> 렌즈를 억불봉에 고정시키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잊고, 그렇게 찍었어요. 수 십, 수 백, 컷트 중 마음에 드는 한 컷트를 얻으려고...사진은 인내의 미학 없이는 작품이 되질 않아요.

순간을 위해 영원을 기다린다 할까?....하하.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지요.”

계절의 변화나  빛에 의한 색광 촬영시간 등을 고려하여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까지, 때로는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셔터만 찰칵 누르면 되는 줄 알았다는 필자의 무식함에 작가는 미소만 지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퇴직 후에 한 3회에 걸쳐 전시회를 열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첫 번째로 광양의 산업, 자연, 전통, 문화,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진을 두 번째로 주성일이 가장 좋아하는 회화성 이미지 사진을 세 번째로 광양의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사진, 광양의 변천사 쯤 되겠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 그만 합시다. <깨댕이 좀 벳기지 마!!!>”

그렇게 취재는 끝났다.
대단한 열정의 사진작가 주성일. 그가 세상에 내어놓을 작품이 궁금하다. /글, 사진 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원